이립(而立)

by 최단감

1. '탁월함'의 박탈

삼키듯이 읽었다. 때로는 씹듯이 읽었다. 독서의 결과 사람의 신체는 텍스트(=언어)로 이루어져있다는 생각을 했다. 즉 사회가 부여한 언어와 규범에 의해 신체가 통제되고 구성된다. '본연' 혹은 '자연'상태의 신체와 사후에 언어로써 '구성'된 신체는 구별될 수 없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언어에 노출되므로. 그러므로 신체는 텍스트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연구하는 문헌학자가 되자. 특히 국가 텍스트 즉 법을 연구하는 법학자가 되자, 그러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동시에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 내 작은 이립(而立)이었다.


그런데 스멀스멀 내 삶 속을 침투하기 시작한 AI는 방대한 '읽기'를 바탕으로 탁월한 글을 쏟아내었다. 처음엔 신기했고 그 다음엔 으스스했다. 텍스트가 변하고 있었으므로 사람의 신체 또한 변하고 있었다. 즉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으스스하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었다.


현 대법관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지 말해줘, 라고 AI에 넣으면 대강 소송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창수 전 대법관이라면 이 민사 판례에 대해 뭐라고 평석할지 말해줘, 라고 AI에 넣으면 알맞은 답이 나올 것이다. 혹은 양창수 전 대법관보다 '탁월한' 평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법학계의 권위자들과 맞먹거나 그들을 뛰어넘는 존재가 곧 생길 것이라거나 이미 생겼다는 감각이 들었고 이번엔 무력감이 들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바라보던 바둑계의 심정을 곧 법학계도 느낄 것이다.


그럼 법학자는 뭘 할 수 있는거지? 앞으로 내가 할 일은 AI의 보조자인가? 애시당초 학문이란 뭐지?


'탁월함'에 집중해본다. 법학은 분명 '탁월함'을 좇는 학문이다. 치밀한 논리구성. 이성에 기반하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법은 사람들의 신용을 얻고 사회 작동 원리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보다 더 '탁월한' 법 AI가 존재한다 치자. 법학계에 AI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을 때, 예를 들어 AI가 내놓은 가장 승소확률이 높은 준비서면이나 소장 구성안이 있는데 그걸 마다할 변호사가 있을까? 고객에게, 'AI는 이렇게 서면을 쓰라고 하지만 저는 그걸 무시하고 제 뜻대로 쓰겠습니다'라고 했을때 수긍할 고객이 과연 얼마나 될까? 판사라고 다를까? 법학자의 경우는? 더 탁월한 판례 평석을 AI가 내놓고, 더 나은 제도 개선안을 AI가 내놓을텐데?


2. 가치의 평가절하

이 모든 고민의 근원에는 '내가 갖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가 저평가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다. 평생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일이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맥이 탁 풀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즉 내가 '인적 자원'이라고 쳤을 때 나라는 자원이 사회에서 갖는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건 암묵적으로 나를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상품처럼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일수도 있고, 인정 욕구의 왜곡된 발현 때문일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식 노동자로서의 내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에서 오는 무서움이다.


3. 일단은...

일단 시험은 최선을 다 해서 볼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뒤 아마 새로운 이립(而立)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텍스트를 연구하는 문헌학자의 꿈을 계속 가져갈지, 어떤 변형을 가해야할지, 혹은 새로운 꿈을 가져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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