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읽기(2) : <태풍>

by 최단감


<태풍>의 주인공 시라이 도야는 문학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시골의 중학교에서 교사일을 하다 연거푸 쫓겨나고 도쿄로 돌아와 저술 활동에 매진한다. 시라이가 저술 활동과 맞바꾼 것은 생활의 윤택함과 안락함이다. 시라이는 돈에 쫓겨 궁핍하게 살면서도 저술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라이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다카야나기가 선생님은 이름을 세상에 떨치기 위해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난 이름처럼 미덥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가 악명이 되든, 오명이 되든, 아니면 광기가 되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일을 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일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내가 걸어야 하는 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에겐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길의 동물이기 때문에 길을 좇는 것이 가장 존엄하다 생각합니다. 길을 좇는 사람은 신 역시 피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 아일린 마일스가 <낭비와 베끼기>에서 글쓰기에 관해 쓴 것이 떠오른다. 그 말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쓰기와 그리기, 그리기와 쓰기, 베끼고 베끼고 베끼기. 신이여. 신이란 이런 반복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그 언어를 사랑해야 한다. 그게 내가 세계와, 또 신과 맺은 계약이다. 신이여."


나쓰메 소세키와 아일린 마일스가 글쓰기에 대해 말하며 '신'을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은 퍽 흥미롭다. 신의 동의어가 운명이라면 위의 두 작가는 자신의 운명과 대등하게 맞서는 감각으로 글을 쓴 것이 틀림없다.


한편 조 모란은 <단어 옆에 서기>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더 나은 버전의 내가 되기 위해서라고 썼다. 그 말인즉슨 더 나은 단계의 나로 거듭나기 위해 글을 쓴다는 뜻일 텐데, 나는 이 말에 잘 공감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글쓰기가 나를 더 '나은' 쪽으로 끌고 나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 역시 위 소설에서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글을 쓴다고 시라이의 입을 빌려 말한다. 글쓰기의 끝에 악명, 오명, 또는 광기가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글을 쓰지 않으면 괴롭다, 이걸 보면 글쓰기가 자신의 길임에 틀림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글을 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라는 말은 체념보다는 자기 스스로 되뇌이는 결의에 가깝다. 설령 그 끝에 파국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다,라는 결의. 아일린 마일스에 따르면 글을 쓸 때 비로소 나는 내 운명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계약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두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요구한다. 글을 쓸 때 비로소 나는 운명과 계약을 맺을만큼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만 계약을 맺는 순간부터 나는 그 계약에 구속당한다. 자유를 위해 속박당하는 아이러니.


그러니까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말하는 길, 마일스가 말하는 계약 비슷한 것에 속박당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것은 조 모란이 말하는 '더 나은 버전의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다. 운명은 자신에게 맞서는 인간에게 그 대가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요구한다. 자유, 행복, 건강 등. 길에 들어서고 운명과 계약을 맺기로 선택하는 순간 나는 그 대가로 자유와 행복을 포기한다. 포기할 자신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만족스러운 이유는 나쓰메 소세키의 입을 빌리면 아무래도 이것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길의 끝에 뭐가 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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