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티멘탈 밸류> 리뷰 : 번역 장치로서의 영화

by 최단감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가 일종의 '외국어'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쓰는 언어와 겹치는 단어나 동사가 있다면 얼추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항상 완전하게 알아 들을 수 있는건 아니다.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소통의 수단, 번역장치로서의 '예술'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

오랫동안 부재했던 아버지 구스타프가 불쑥 찾아와 자신이 감독하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노라는 아버지와 입씨름을 벌인다. 자신이 출연한 연극을 봤냐고 묻자 아버지는 제대로 연극을 본 적도 별로 없으며 그나마 본 연극들도 신통치 않았다는 태도를 보인다. 아버지에 대해 오랫동안 쌓인 애증과 더불어 아버지가 자신의 연기에 보이는 태도에 화가 난 노라는, 그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고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딱히 그런 노라에게 사과하려거나 달래려하지도 않고 "일단 대본을 읽어보라"고 할 뿐이다.


한편 노라 대신 캐스팅 된 배우 레이첼은 연기를 위해 캐릭터를 구축하고 이해하려 애쓰지만 도무지 캐릭터의 행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캐릭터는 애초 구스타프가 딸 노라를 생각하며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노라를 만나 "슬픔이 그 사람의 어마어마한 일부 같아요."라고 그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네 안에서 내가 보여"라고 말한다. 노라는 무대에 오르기 전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리며, 연인과 친밀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조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 행복해하다가도 급격히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예민하고 불안해하며 슬퍼한다. 아마 구스타프는 자신을 닮은 딸 안에서 자신의 예민함과 불안함, 슬픔을 알아본 것일 것이다.


예정된 연극을 취소해야 할 정도로 심적 고통에 빠져 있던 노라는 동생 아그네스의 부탁으로 구스타프의 대본을 읽게 된다. 대본을 읽은 노라가 그 영화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촬영을 무사히 마치는 것으로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마무리된다.


번역장치로서의 예술

노라와 구스타프가 직접 대면했을 때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노라는 구스타프에게 항상 화가 나 있으며, 구스타프는 그런 노라에게 아버지로서 할만한 다정한 말이나 사과의 말을 딱히 건네려하지도 않는다. 그런 두 부녀가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구스타프가 찍고자 하는 영화다. 즉 두 부녀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일종의 '번역 장치'이다. 과거와 상처를 직접 호명하지 않고도 공유 가능한 형태로서의 영화. 그래서 레이첼은 그 영화를 진정으로 깊게 구현해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번역 장치는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구스타프와 노라의 고유한 기질, 상처, 역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노라는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이는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노라의 타고난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정은 예술가로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무대 아래의 생활에 있어서는 노라를 끊임없는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비단 어린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떠났다는 점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저주스러운 성정을 물려주었다는 점 또한 노라가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이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일 수 밖에 없다. 이는 구스타프와 노라가 서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랑과 화해의 방식으로서의 예술

동생 아그네스가 힘들어하는 노라와 포옹하며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은 단연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구스타프와 노라, 아그네스 셋 중에서 유일하게 다정하고 따뜻한 가정을 꾸린 사람은 아그네스가 유일하다는 점에서도 아그네스는 나머지 두 인물과 궤를 조금 달리하는 인물이다. 구스타프와 노라는 결코 "사랑해"라고 먼저 말할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다. 다만 구스타프는 노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영화 대본을 썼고, 그런 아버지와 화해하는 제스처로 노라는 영화에 출연한다. 즉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방식조차 예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센티멘탈 밸류>를 보게 되면 나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어떤 번역 장치를 가질 수 있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에서도 가까운 친지들의 생각에서도, 나는 아버지의 자식들 중에서 아버지를 가장 빼닮았다. 성정이나 외모나 이제껏 밟아온 삶의 궤적 등. 심지어 아버지가 쓴 글을 읽거나, 아버지와 장기를 두거나 할 때 글을 진행시키는 방식이나 사고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 놀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나와 유전적이나 정신적으로 가장 닮은 존재는 아버지다. 그런가하면 정서적으로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자꾸 아버지에게서 내가 보였으므로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했다. 노라가 연극 전공 입시 시험을 치르기 위한 대본으로 자신이 쓴 개인적인 에세이 대신 유명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택하거나, 개인적인 내용을 다루는 연극작품보다는 보편적인 고전 작품을 택하는 이유도 아마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진심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응수한 적이 없다. 비겁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내심 나를 미워하고 섭섭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다만 해를 넘길수록 쇠약해지는 아버지 또한 있다.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만약 세상에서 아버지가 사라진다면 나는 분명 크게 무너지리라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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