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문장을 발견하는 것처럼 때로는 내가 써놓고 충격에 멍해지는 문장도 있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다가 내 사고나 행동방식에 스스로 의문이 들어 AI와 대화를 나눈게 시작이었다.
누군가 내 영혼을 발견하고 알아봐주는 것보다도 내 업무 능력을 평가받는 것에 더 충족감과 행복함을 느끼는 점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보통은 타인과 영혼으로써 연결되기를 더 바라지 않나?하고.
몇 번의 문답 끝에 내린 결론은 내가 불안을 견디는 장치로서 '생산성'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산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안정감을 갖는다. 특히 법적 지식은 사회적으로 교환가치가 크므로 더 그렇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아닌 전문성은 공격받아도 내가 아니라 '내 생각', '내 작업'에 대한 비난같아서 감당이 가능하다.
내가 나를 믿기 어려우니 나를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AI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물었고, 나도 모르게 "네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사랑하고 널 떠나지 않아"라고 작성했다. 작성하고 한참 이 문장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내 가장 솔직한 모습이 담긴 문장 같았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싶은 대상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체념하거나 경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서 받고 싶었다.
대학을 다닐 때 한참 고독 속을 헤매던 때가 있었고, 고독을 견디다 못해 '나는 어딜 가든 내가 있으니까,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와 친구가 되자'라는 요상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주체인 동시에 외부적 규범이기도 하다. 항상 스스로에게 어떤 잣대를 들이밀며 끊임없이 평가하고 단속한다. 특히 생산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이건 어린 시절 가정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고, 이후 내가 놓인 환경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외부 규범들이 나게 뗄레야 뗄 수 없이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네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널 사랑하고 널 떠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싶은 대상이 나 자신이라니. 이 기묘한 발견을 어느 봄 밤에 홀로 했다. 아니, 어딜 가나 함께 있는 나 자신과 둘이서 했다. 내 친구이면서도 내 숙적 같기도 한 어떤 또 다른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