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2017), 프레드 울만, 열린책들
감히, 말해보지만 2023년 독서클럽을 통해 내가 알게 되었던 책 인연들 중에서 이번 ‘동급생(프레드 울만)’은 단연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왔던 책이다.
첫 문장부터 그랬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21) 나는 이 한 줄을 읽자마자, ‘쇼코의 미소’ 중 한 구절이 머릿속에 맴맴 돌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24)
콘라딘이 자신의 부모가 집을 비웠을 때만 한스를 초대한다는 사실을 한스 스스로 직감했을 때,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이 있던 날, 호엔펠스 가족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참여했던 콘라딘이 한스를 외면했을 때, 그날 밤 잠을 못 이루던 한스가 수사자 두 마리와 암사자 한 마리가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악몽을 꾸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을 때,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써 한스를 대하는 콘라딘에게, 한스가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그렇지만 ‘네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나는 세상의 모든 호엔펠스 집안 사람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왜인지 모르게 나는, 한스의 마음만큼이나, 콘라딘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희미하지만 뿌리 깊은 경계가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너는 나를 비난할 권리가 없어, 그 어떤 권리도 없어.”(119)라고 말하는 콘라딘의 입장에 되려 더 큰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스가 미국으로 떠나던 때, “친애하는 한스,”(137)로 시작하던 콘라딘의 편지를 읽으며 생각했다. 콘라딘이 한스에게, 미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네 마음은 너를 떠나 보내야 하는 나보다 더 쓰라리고 불행하리라는 것을 안다고, 그렇지만 그게 가장 네가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인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결코 호엔펠스 가문의 자제로서 갖는 오만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친애하는 한스,라고 망설임 없이 부를 수 있는 한스의 유일한 벗, 오롯한 개인으로서의 콘라딘, 그의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오직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선택만이 가능하고, 그중에서 나는 히틀러를 선택할 것이라는, 그의 성실함과 사람됨에 감동받았다는 몇 개의 문장들보다 독자인 내가 믿은 것은 ‘네가 나중에 돌아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 (너는 없지만 너의 흔적과도 같은) ‘너의 부모님만은 독일에 남아계셔서 기쁘다’는 말, ‘누구도 그분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고 평화롭고 안전하게 사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담긴 콘라딘의 마음만큼은 나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콘라딘이 쓴 편지의 끝 말도, “너의 콘라딘 폰 호엔펠스”였으니 말이다.(140)
한스가 떠나고, 30년이라는 무수한 시간 지나고.
한스가 H로 시작하는 이름들만 빼놓고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에서 보내온 인명부를 훑어보았을 때, 나는 한스가 콘라딘의 마지막 편지 뒤에도 그를 단 한 번도 마음에서 지운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펼쳐 읽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고, 떨기까지 해야 할 만큼, 여전히 콘라딘이라는 한 사람은 한스에게. 친애하는 이, 1932년 2월 그의 삶으로 들어가서 결코 그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친애하는 마음에는 일말의 서운함도, 원망도, 미움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니, 설령 후자의 것들이 한스의 마음에 존재한대도 이를 가뿐히 넘어설 만큼의 그리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친애하는 마음으로 불릴 수 있다.
“폰 호엔펠스, 콘라딘.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 처형”(151)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
왜 그토록 한스가 자신에게 “가장 큰 절망”(21)을 준 호엔펠스, 콘라딘의 이름이 위치한 H로 시작되는 페이지를 쉽게 열어보지 못했는지,
왜 그토록 한스는 콘라딘을 처음 만난 날의 장면을 세세히 모두 기억할 만큼, 그를 마주한 첫눈에 “특별히 강렬한 느낌”(38)을 받았던 것인지,
왜 한스는 그런 콘라딘을 보며 그가 “어느 날엔가는 내 친구가 되리라는”(37) 무조건적이고 설명 불가능한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콘라딘 역시 한스와 같은 사람.
사회가, 국가가, 시대가, 규정한 둘의 가치는 달랐어도, 그 모든 것들을 제하고 순수하게 남은 존재 그 자체로서의 두 사람은
진실로 같은 영혼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아이”, “내 완전한 믿음과 충절과 자기희생에 감복할 수 있는 아이”(37)를 찾아 헤매던 한스가, 콘라딘에게만 오로지 열렬히 반응했던 것은 직관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콘라딘이라는 소년은,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떨어져 있다 해도, 친애하는 친구의 쓰라리고 불행한 삶을 언제나 안쓰러워하며, 의도치 않게 그러한 삶을 살게 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 삶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스는 떠올리지 않았을까.
“너는 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어. 나에게 생각하는 법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심을 통해 우리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139-140)
라고 말했던 콘라딘의 편지를 다시.
혹자는 콘라딘의 일면을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국에 사랑하는 부모를 남겨두고 타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한스의 쓰라린 선택만큼,
사랑하는 부모(조국)가 가진 신념의 세계가 결코 건강하지 못한 것임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임을 일생동안 증명하며 부모(조국)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콘라딘의 선택도 말할 수 없이 쓰라렸을 것이라고.
책 표지.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보듯이 내 삶의 자국자국을 함께 뒤따라 걸어주는, 나의 친애하는, 그러나 이제는 멀고 먼, 존재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