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사라졌고, 리더의 말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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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냥 이대로 써도 되죠?”
“맞는 내용이죠?”
“이 수치는 어떻게 나온 거예요? “
”이거 수치 너무 작으니 이렇게 조정할게요! “
일을 하다 보면 연쇄적으로
이런 질문이 메신저 혹은 전화로 날아든다.
그것도 빨리 답하라는 압박까지 있다.
표면적으로는 정중한 확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실린 건 **의심도, 요청도 아닌 ‘책임 회피’**다.
놀라운 건, 이 질문이
이미 완성된 보고서를 읽은 뒤에 던져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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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도, 이력도, 스토리라인도 이미 반영돼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읽지 않은 채 다시 물어온다는 것.
아니, 어쩌면 애초에 읽을 의지가 없었던 것일지도...
단순한 무성의함이라 생각했던 이 패턴은
몇 달, 몇 년을 반복하면서 하나의 조직 언어가 되었다.
판단은 피하고, 표현은 부드럽게.
지시와 요청의 경계를 흐리고, 책임의 출처를 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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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투는 리더의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리더의 바로 아래,
보고서를 정리하는 ‘취합자’에게로 전염되었다.
“포맷만 맞춰주세요.”
“글틀만 대충 잡아주세요.”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올려봐도 될까요?”
판단은 피하고, 일은 아래로 흐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언어는
취합자 실무자 다른 부서로 번지며
조직 전체에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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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어느 순간부터
실체가 아닌 화법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가 지시한 내용보다
그가 남긴 말투가 더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감염은 보고서 하나하나에 배어들고,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보고서만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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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에서 마주한 어떤 실무자의 톤을 듣고
문득 생각했다.
“이 말투…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 말, 몇 달 전 임원 회의에서 누가 했던 거지?”
“그때 정리해 주던 실무자가… 지금 이 말 그대로 하고 있네.”
조직은 리더를 닮는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의 무책임한 말투를 그대로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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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타까운 건,
그 말투를 따라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본인이 이미 병들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니까’,
‘이게 윗사람이 원하는 방식이니까’.
이렇게 오늘도,
판단 없는 보고서가 생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