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하던 하나님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모세도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어서 뒷모습만 겨우 봤는데, 욥은 어떻게 봤다고 하는 것인가? 욥이 말하는 눈으로 본 하나님은 진짜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벗어나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들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신앙을 시작한다. 귀로 들어온 하나님은 삶이 평안할 때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래서 욥의 세친구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이 '귀로 듣던 하나님'의 논리이며 '인과응보' 신학이기도 하다.
그런데 갑자기 삶에 예측 불가능한 고난이나 재앙이 시작되는 순간 귀로 들은 하나님은 더 이상 나의 편이 아니다.
욥은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자신은 절대 잘못한게 없다면서 배 째라고 말한다. 귀로 들어온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욥의 이런 태도는 귀로 들어온 하나님을 '정답'으로 알고 있는 세 친구들에게는 변절자의 태도다. 그들은 욥에게 정의를 가장한 폭력을 가한다. 물론 이 폭력은 '성경적'으로는 옳다.
욥은 하나님과 씨름을 시작한다. 그는 '정답' 찾기는 포기한다. 귀로 들어온 하나님 앞에서 욥의 논리는 '오답'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하나님 나와라'다.
마치 시편의 기도들 처럼 탄식과 절규를 통해 하나님을 불러댄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마침내 하나님을 소환하는데 성공한다. (하나님을 소환할 때 주문은 '시편'이 짱인듯?)
폭풍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통해 욥은 새로운 '정답'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불친절했다. 덧셈, 뺄셈을 가르쳐달라고 울부짖던 욥 앞에서 하나님은 양자역학을 이야기 하고는 사라져 버린다. (베헤못, 리워야단, 천지창조 등.)
욥은 덧셈, 뺄셈의 '정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본다'. (양자 얽힘,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읽은 기분을 떠올려봐라.)
욥의 삶은 여전히 그대로다. 다만, '정답' 을 위한 귀로 듣던 하나님이 아니라. 양자역학적 삶을 함께 살아갈 하나님의 '존재'가 욥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는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피카소가 그린 <황소>, <평화의 비둘기> 같은 그림을 보면 누구나 다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똑같이 그린다고 해도 피카소의 그림처럼 취급해주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피카소가 선 몇개로 그림의 실존을 표현하기 까지 겪어왔던 수 많은 해체의 여정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땐 그저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무언가 감탄한 듯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만으로 중간은 간다.
마찬가지다. 욥의 이 고백을 읽는다고 해서 귀로 듣는 하나님을 넘어서 눈으로 보는 하나님에게 갈 수 있는게 아니다. 욥처럼 삶의 부조리 속에서 '정답'을 찾기위해 시편 저자와 같은 절규로 하나님을 불러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신앙이다.
그럴 땐 그저 욥과 같은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 감탄한 듯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만으로 중간은 간다.
깝치다가 욥의 세 친구처럼은 되지 말자.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