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14) 주일예배 설교문
(사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여러분, ‘예언자’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흔히 수정구슬을 보며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차 강조했듯, 성경이 말하는 예언자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預言)의 ‘예’자는 미리 예(豫) 자가 아니라, 맡길 예(預) 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대신 전하는 ‘대언자’입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면 그 미래를 전하는 것이고, 현재를 꾸짖으시면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령 미래를 모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맡겨진 말씀을 충실히 전한다면 그는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눈이 아닌, 지금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으로 이 땅을 보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는 데 익숙합니다. 사회생활 하려면 아부도 좀 하고, 작은 거짓말은 눈감아 주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넘어갑니다. 반대로 원칙을 따지면 "왜 저렇게 융통성이 없어? 왜 저렇게 예민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사소한 불의’를 보고 펄쩍 뛰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볼 때 과민 반응이라 할 정도로 예민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자기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6:14)
다들 평안하고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예언자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설교는 듣기 싫습니다. 부정적이고, 재수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너희의 예배가 역겹다! 너희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다!"라고 소리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대답을 들어보면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모든 자, 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 (신명기 25:15-16)
갑자기 시장의 언어가 나옵니다. 예배 순서가 틀렸다거나, 헌금을 빼먹었거나, 새벽 기도를 빠졌다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경제 활동, 장사, 사업, 일터에서 '속이는 짓'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숭배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다른 종교의 신상에 절을 하는 행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저울추를 속여 잘 먹고 잘사는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처럼 가증스럽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나는 예배 잘 드리고 속이는 일도 안 했는데, 왜 내 예배까지 문제 삼느냐?"라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국무회의 보고를 통해 밝혀져 뉴스에도 많이 나온 내용입니다. 코레일 같은 공공기관이 기차를 구매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연히 경쟁 입찰을 통해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가 선정되어야겠죠. 그런데 ‘다원시스’라는 기업의 사례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이 회사가 기차 납품 사업을 따냈는데, 대금 지급 방식이 이상합니다. 보통은 계약금 30%, 중도금 30%, 잔금 40% 식으로 지급합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기차를 한 대도 안 준 상태에서 시작할 때 돈의 70%를 먼저 받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2018년에 기차 358칸을 계약했는데 100칸만 주고 250칸은 안 줬습니다. 돈은 70%나 받아 갔는데 말이죠. 이 정도면 고발을 하고 다시는 계약을 안 하는 게 정상인데, 2021년에 300칸을 더 주문합니다. 이번에도 선금을 받아갔지만, 그 돈만 받고 아직 한 칸도 납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24년에 또 계약을 합니다. 150칸, 약 3,000억 원 규모입니다.
이런 식으로 돈만 받아 가고 물건을 못 받은 게 9천억에서 1조 원 규모라고 합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초등학생이 코레일 사장을 해도 "저번 기차 먼저 주고 이야기하세요"라고 할 텐데, 상식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알고 보니 코레일 출신 고위 공무원들이 퇴직 후 그 회사로 재취업하고 있었습니다. 전형적인 ‘전관예우’이자 비리 카르텔입니다. 대한민국에 코레일 같은 공공기관이 350여 곳입니다. 과연 이 모든 기관들이 정직할까요? 하나님이 왜 ‘속이는 저울’에 그토록 민감하신지 아시겠습니까?
"아, 참 나쁜 놈들이네" 하고 끝나면 좋겠지만,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속이는 행위는 결국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잠언 1:11-13)
이렇게 부당하게 돈이 흘러간 곳이 한두 군데겠습니까? 기차 납품도 제대로 안 하는 회사에서 그나마 납품한 기차의 상태는 또 어땠을까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압니다. 코레일 내부에서 나온 증언에 따르면, 불량률도 많고 속도도 느리며 고장도 잘 난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피해를 볼까요? 돈 많고 운전기사 있는 분들은 기차에 별 관심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결국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서민들이 그 피해를 보게 됩니다.
기차를 산답시고 돈을 엉뚱한 데 다 썼으니, 정작 고장 나서 수리해야 할 예산은 줄어들었을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2013년 성수역, 2015년 강남역, 2016년 구의역, 2022년 정발산역... 제가 아는 것만 4건입니다. 왜 계속 반복될까요? 원칙대로 2인 1조로 작업하면 살 수 있는데, 인건비 아낀다고 혼자 내보내기 때문입니다. 왜 인건비가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고위 관계자들이 이미 다 엉뚱한 곳에서 예산을 낭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6년 구의역에서 사망한 김 군을 기억하십니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 청년이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보탬이 되겠다고, 월급 144만 원을 받으려고 혼자 선로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숨진 그 작업 구역 한곳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 하나가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끼니 때울 시간도 없이 일하다가, 그 차가운 선로 위에서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단 하나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속이는 저울'과 '가난한 자의 희생'은 지금도 이 땅에 여기저기 진행중입니다.
예언자는 바로 이 사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19살의 김 군이 죽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함께 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교회에 안 가는 이유는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앙이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있는 곳이 곧 교회이며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그 사건 현장 위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김 군 같은 아이들이 희생당한 그 자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지금 너희가 드리는 예배는 가짜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시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예배당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랑합니다", "복 받으세요", "잘 될 겁니다"라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예배당 안에서 144만 원을 위해 목숨을 건 청년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단 한 조각이라도 있었습니까? 권력자들이 취한 부당한 이득에 대한 분노와 하나님의 정직을 요구하는 외침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 돈이 어디서 난 것인지 묻지도 않고, 그저 십일조 천만 원, 일억 원씩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축복해 주는 시간을 가졌습니까?
그래서 예언자가 말하는 겁니다. "거기엔 하나님이 없다"라고요.
혹자는 말합니다. "왜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속이는 저울'에 대한 이야기며, '억울한 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소리친다고 말씀하시며 아우의 행방을 묻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설교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1-12)
네, 예배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가장 정성을 들여 진행했던 그 예배와 제사와 예식을 멈추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 제가 어떤 설명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예배를 요구하십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사야 1:17)
19살 김 군의 그 먹다 남은 컵라면이 놓인 자리가 바로 우리가 예배해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사야가 말한 18절의 말씀, 참된 회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우리의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지는 진정한 회복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일어납니다. 정말이냐고요? 네,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서 일어납니다.
저도 압니다. 이런 거친 말씀보다, 주일에 감동적인 찬양과 위로가 되는 설교를 듣고 "아, 오늘도 은혜받았다" 라는 감정을 소유한 채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예배가 성도들에게 인기가 있고 그들이 좋아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예언자들은 빈말이라도 그게 잘 안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역겹다고 하시는 예배는 치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을 읽거나 찬양을 부를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게 아닙니다. 뉴스를 볼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며, 억울한 피가 흘려진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습관적인 종교 생활을 멈추고, 저와 함께 오늘도 사건의 현장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하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불편한 예배로 성도님들을 초대합니다. 불편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게 약속드립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