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브루그만은 예수님의 사역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연민(Compassion)' 이라고 말한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이며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다.
제국은 '무관심'을 먹고 산다.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척 할 수록 제국의 체제는 유지하기가 편하다. 고통 받는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이 체제는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연민'이었으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유발하는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고발하는 행위로 이어지며 이 행위는 예수가 정치적 목적이 있었든, 없었든, 제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 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이소선 여사가 전태일의 분신사건을 경험하면서 아들에게 느낀 '연민'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고통받는 노동자들에게 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이소선 여사는 이 사건을 무마하려는 제국의 온갖 회유(거액의 합의금)를 거절하고 아들의 유언을 따라 행동한다.
그 연민으로 인해 정치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한 어머니는 고통받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너희들이 모두 태일이다." 라는 말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그렇게 한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그녀는 투사가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연민을 품은 한 어머니였다.
예수의 연민은 제국(대제사장, 바리새인,, 로마 등)과 사사건건 부딪친(힌)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듯 연민은 예수를 십자가로 인도한다.
무관심해야 하는 일에 한 두번 개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 지치지 않고 개입하게 하는 것. 이제 그만해야지 라고 했을 때 또 개입하게 하는 것은 바로 '연민'의 힘이 아닐까? 나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나를 십자가로 인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