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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ug 27. 2019

[글로그 24] 성장과정을 적어주세요.

어른들은 "나중에 떼인 돈 잘 받으러 다니겄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게 되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바람이 불고 통장엔 아직 월급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소개서도 그냥 쓸만하게 느껴졌다. 자기소개서를 처음 쓴 건 2년 전쯤이었다. 그때 가장 곤란했던 건 성장과정 항목이었다. 자기소개 항목 중 성장과정이 있는 건 사실 자연스럽다. 비로소 내가 '이런' 사람이 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게 성장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문항의 의중을 읽지 못해 막막했다.


성장과정을 쓸 때는 몇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 라인을 짜면 좋다. 부모님을 여의지만 의지를 발휘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이 자리에 왔다,는 구성이면 퍼펙트지만, 나는 부모님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진중히 고민해야 했다. 사실 사람의 가치관이나 진로는 화산섬처럼 뭔가 뻥 터져서 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침식해안처럼 야금야금 깎여서 정신차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글로 설명하기 많이 애매하다. 그럼에도 면접관들이 영웅서사적 스토리텔링에 혹하는 것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다.


이번에 지원한 직무는 콘텐츠 에디터다. 성장과정 중에 콘텐츠 에디터와 관련 있는 사건이 있을까 생각해 봤다. 음 미술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내 또래 중에 초등학생 때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중에 한 군데 이상 안 다녀 본 애는 없을 것이다. 경쟁자의 약 30%가 갖고 있을 스펙을 나의 장점으로 내세울 순 없어 포기했다. 좀 더 생각해 보니 미술학원과 콘텐츠 에디팅은 별로 상관 없는 일인 것도 같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이 여름의 끝을 잡고 매미는 맴맴 울었고 나는 매미 소리를 매개체 삼아 학창시절의 여름에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족신문

초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선풍기를 돌돌돌 틀어 놓고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방학숙제를 좋아했다. 무료한 일상을 달랠 소일거리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재활용품으로 뭐 만들기, 미래의 뭐 그리기 같은 건 특히 좋아했다. 다 만들면 집 안 사람들을 하나씩 붙잡고 원하는 만큼의 칭찬을 얻을 때까지 보여주고 그랬다. 그때 하고 있던 숙제는 가족신문 만들기였다. 우리 가족은 딸의 얼마 없는 재능과 흥미를 고취시키기 위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는 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의 칭찬이 가장 허황되고 미래 예언적이었다. 우리 손녀는 손재주가 좋아서 이 다음에 화가가 되든 작가가 되든 뭐든 될 것이며 성실하고 마음이 고와 부모와 조부모에게 꼭 효도하고 살 것이다 등등. 마지막엔 이게 다 당신의 손재주를 물려받아 그런 것인데, 할애비를 닮아 엄지손톱이 엄지발가락처럼 넓적한 걸 보면 알 수 있다며 본인의 덕을 운운하셨다.


할아버지는 칭찬 후 500원의 용돈을 주셨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거기에 웃돈을 얹어 준다면 고래의 트월킹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돈의 달콤함을 맛본 나는 이제부터 일요일마다 가족신문을 만들겠다고 했다. 만드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A4용지를 반으로 접어 4면짜리 신문을 만들었다. 1면 제일 위에는 '가족신문'이라고 큼직하게 쓰고 한 주 동안 있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썼다. 2, 3면에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일을 쓰고, 4면까지 가면 조금 귀찮아져서 대문짝만하게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얼마간 꽤 열심히 했던 기억이다. 어떤 일을 기사로 쓸지 고민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색칠도 하고 무엇보다 500원을 받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의 것들은 그 재미나 가치를 알기 전에 고됨부터 알게 되는 것일까. 나는 에디팅의 재미를 채 알기도 전에 소재고갈과 마감임박의 시련을 먼저 겪었다. 신문에 실을 만한 소식이란 '학교 끝나고 혜원이네 놀러갔다'거나 '엄마 생일이었다'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소재는 금방 바닥나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감 일자는 매주 꼬박꼬박 다가왔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기에 500원은 그리 넉넉한 예산이 아니었다.


나는 신문 만드는 일이 갈수록 괴로워졌다. 하루는 500원에 이런 고생을 약속한 스스로를 죽도록 미워하면서 흰 종이를 머리에 썼다가 안고 뒹굴다가 바닥에 던졌다가 발로 밟다가 결국 일요일이 다 갈 때쯤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신문을 받아 든 할아버지는 "왜 흑백이냐"는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셨다. 나는 "신문은 원래 흑백"이라는 다소 구차한 변명을 했다. 할아버지는 색칠이 없으니 제값을 다 줄 수 없다며 300원을 주셨다. 그 순간 나는 그 간 하기 싫었던 울분과 일요일을 날려버린 설움과 백원짜리 세 개에서 느껴지는 묘한 비참함이 복잡하게 얽히며 머리 꼭지가 홱 돌아버렸다.

"이런 게 어딨어!!! 이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할아버지가 알아?!!!! 빨리 이백원 더 줘!! 이백원 더 줘!!! 이백워어언!!!!!!!"

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다가 할아버지 손에서 신문을 뺏어 갈기갈기 찢었다.


할아버지는 다소 의아하셨을 것이다. 지가 한다고 해서 용돈까지 쥐어주면서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이 옘병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실에 있던 아빠와 엄마도 와르르 달려왔다. 찢어진 종이가 바닥에 나뒹굴고.. 그 위엔 딸래미가 나뒹굴고... <좋은 부모가 되는 101가지 방법> 어디에도 이백원을 달라고 자지러지게 우는 자녀를 훈육하는 방법은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부모는 딸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 외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아버지는 얼른 이백원과 양갱을 쥐어 주며 "할아버지가 그런 줄 몰랐다"하셨다. 잔금을 받은 나는 이성이 돌아왔고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졌다. 어른들은 이 일을 두고두고 "나중에 떼인 돈 잘 받으러 다니겄다"는 덕담을 해주셨다.


#전사 게임

세월이 흘러 패륜아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메이플스토리나 바람의나라 같은 RPG 게임이 한창 유행하던 때였다. 동시에 랜덤으로 캐릭터를 그리는 놀이도 인기였다. 이게 무슨 놀이냐면 종이에 얼굴형, 눈, 코, 옷, 액세서리 등을 다양하게 잔뜩 그린다. 그리고 랜덤으로 얼굴형 하나를 고르고, 눈 모양 하나를 고르고, 코 모양 하나를 고르고 해서 캐릭터를 완성한다. 랜덤으로 정하는 방법은, 예를 들어 눈 모양을 정한다고 하면, 연필 뒤쪽을 종이에 대고 여러 개의 눈 모양 사이을 벌새처럼 빠르게 왔다갔다 한다. 캐릭터의 주인이 "스톱!"을 외치면 연필을 딱 멈춘다. 그럼 그 자리에 있는 눈 모양이 당첨되는 것이다. 이게 이론적으론 랜덤인데 실상은 연필을 쥔 사람의 의지에 좌우되는 일이라 이거 때문에 머리채 잡고 싸우는 애들도 많았다.


그 애들 중 하나가 바로 나다. 나는 주로 연필을 흔드는 역할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게임 운영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RPG 게임과 랜덤 캐릭터 게임을 접목하여 새로운 게임을 만들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야 학교에서 코딩을 배운다지만, 그때의 초등학생들은 더없이 아날로그적이었으므로 공책에 하나하나 그려 게임을 만들었다. 그래도 웬만한 게임에 있는 건 다 있었다. 캐릭터, 상점, 던전, 퀘스트, 레벨 별 아이템까지 다 있었다. 미술학원에서 배운 것들은 죄다 그 게임을 그리는데 써먹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열정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게임의 이름은 심플하게 '전사게임'이었다.


전사들은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아 '코인'을 벌 수 있었다. 몬스터를 잡는 것은 몬스터 그림을 손가락으로 몇 번 꾹꾹 누르는 행위로 대체 되었다.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잡을 수록 더 많은 코인을 벌 수 있었다.

전사게임은 날로 인기가 많아져 쉬는 시간에 내 자리는 인산인해였다. 처음엔 내 짝꿍과 앞자리, 뒷자리 애들만 하던 것이 한 명 두 명 늘더니 나중엔 다른 반 애들도 수줍게 자기도 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가 되었다. 애들은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먼저 잡기 위해 종 치기 전부터 책상 바깥으로 한 쪽 다리를 빼 놓았다가 종이 울리자마자 튀어왔다. 나는 점점 더 많은 몬스터를 그려야 했다. 수업시간에 몰래몰래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코인으로 랜덤 게임에 참여했다. 랜덤게임에선 무기나 악세서리 같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랜덤이었기 때문에 애들은 원하는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코인을 게임에 꼴아박았다. 내가 전사게임을 계속 키웠다면 리니지도 "형님!!"할 사행성 게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종이 쪼가리 위 게임에 대한 아이들의 욕망은 갈수록 심해졌다. 어떤 애는 친분을 내세우며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남겨놔 달라 하기도 하고, 어떤 애는 랜덤 아이템을 고를 때 '대천사의 날개'에서 연필을 멈춰달라며 빼빼로를 찔러 주기도 했다. 나쁜 짓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었다. 컴플레인 역시 많아졌다. "왜 내가 할 때만 구린 몬스터가 나오냐" "나는 반이 멀어서 빨리 오기 힘들다" "아이템을 왜 더 안 그리냐" 등등... 그럼 나는 "운영자 마음이다"라는 말로 항의를 일축해 버렸다. 이것이 권력의 맛인가 싶었다.


나는 운영자라는 이유로 내 캐릭터에 온갖 멋지고 번쩍거리는 아이템을 다 입힐 수 있었다. 하루는 한 여자애가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네가 차고 있는 아이템은 상점에도 없는 거다"

"이건 운영자만 가질 수 있다"

"내 아이템은 왜 이렇게 구리냐"

"랜덤인데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일부러 연필을 이상한 데서 멈추는 게 아니냐"

나는 내 팔은 내 자유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기계처럼 움직인다, 눈도 감고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반론을 폈다. 여자애는 초등학생의 머리로 '게임 만든 사람 마음'이라는 흡사 절대적이어 보이는 논리를 깨기 어려워 다른 애들에게 동조를 구했다. 하지만 다들 혹시나 게임에서 불이익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곤란한 표정만 지었다. 나는 공기의 흐름 상 승리가 내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느꼈다. 여자애를 포함한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여자애는 입을 다물고 씩씩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여자애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여겼는지 전사게임 공책을 뺏어 자기 캐릭터에 엑스를 북북 긋고 돌아섰다


나는 여자애의 뒷모습을 보며 '네가 아니어도 내 게임 할 애들은 얼마든지 있다'는 13세다운 심술맞은 생각을 했다. 동시에 어딘가 깨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긴 힘들었다. 그저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만 열심히 곱씹었다. 여자애 사건 때문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들도 나도 게임에 흥미를 잃고 전사게임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놀이는 나머지 다수에게도 즐겁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전사게임을 끝으로 내 권력자 놀이도 끝이 났다.


어린시절을 돌이켜 보면 분명 뭔가를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결말은 이다지도 찝찝한 걸까. 관심은 있는데 뒷심은 없어서일까. 돈이나 권력 같은 잿밥에 눈이 멀어서일까. 아무래도 성장과정이 이런식이라면 어떤 면접관도 날 탐탁히 여길 것 같지 않아 자소서가 아닌 이곳에 적어보았다.


+전세로그 8. 26

아이고 벚꽃쿵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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