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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ug 30. 2019

[글로그 25] 부산행 (상)

"저기 아까 환불했던 표 다시 예매해주세요"

나와 마리와 형이는 대학 동기로, 알고 지낸지 8년 째다. 만날 때마다 "이제 그만 볼 때 되지 않았을까.."하지만 셋 다 서로가 아니면 이렇다 할 친구가 없어 간간히 만나고 있다. 마리의 본가는 부산이다. 마리는 스무살 때부터 "방학에 부산 놀러와! 오면 재워줄게!"라고 말했고 우리 역시 "야아~ 당연하지이~ 갈게 갈게!"라고 답했다. 하지만 대게 '밥 한 번 먹자!'는 사람들이 그렇듯 여덟 번의 방학이 지나고 그 후로도 3년이 지날 동안 우리는 부산에 가지 않았고 아가리로만 우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마리의 전세집에서 셋이 술을 마시는데 또 그놈의 부산 얘기가 나왔다. 평소 같으면 "그래 언제 한 번 가자~"하고 넘겼겠지만 우리는 술이 조금씩 취했고 그래서 그날따라 어영부영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8년이나 친구로 지내면서 부산에 가지 않았다는 건 우리의 우정에 대단한 오점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이상할 정도로 결의에 차서는 올 여름에야 말로 꼭 부산에 가자고 뜻을 모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중 조금 더 취한 누군가가 ktx를 당장 예약하자고 했다. 나머지도 옳소 옳소 우가 우가 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눈에 보이는 대로 다다음날 ktx를 예매했다. 이번 부산행을 통해 우리는 젊고, 우리의 우정은 굳세며, 우리의 여름은 찬란하다는 걸 증명하자며 투쟁적으로 건배를 하고 장렬히 기절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 혹은 신의로 이룬 약속.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추진력. 이번 일의 경우 그 무엇보다 객기가 한 몫을 한 것 같다. 술 깬 빵떡은 언제나처럼 술 취한 빵떡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어제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리고 ktx 표를 환불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다행스럽게 환불이 된다고 해서 "예 환불해 주세요"했다가 잠시 생각해 보니 어제 분위기가 거의 임시정부 수립 급으로 진지했으므로 내가 부산에 안 간다고 하면 거의 매국노 취급을 받을 것 같아 "저기 아까 환불했던 표 다시 예매해주세요"했다. 그렇게 부산에 가게 되었다.


마리네 본가는 구포역(부산역 바로 전 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다. 역세권임은 물론이고 무려 45층이어서 구포역에 내려서 가장 높은 건물을 향해 걸어가면 된다. 마리네 도착해서 첫 번째로 놀란 것은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뷰였고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 뷰를 보며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작은 바였고 세 번째로 놀란 것은 집 안에서 엘레베이터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형이는 마리네 집이 야경 명소이며 근미래형 건축물이며 부산 제 1의 관광지이다, 이제 3박4일 동안 여기에만 죽치고 있으면 되는 거냐, 곧 일류 요리사가 와서 참치회를 떠주는 거냐 하는 말 같지 않은 소리를 신나게 씨부렸다. 마리는 받아 칠 가치도 없다는 듯이 표표히 자리를 떴고 그럴 수록 우리는 악착같이 놀렸다. 친구에 한해서는 집이 좋다는 것도 놀림 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밤 12시가 다 되어 마리네 도착했으므로 그만 민폐를 끼치고 씻고 자야 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치카치카를 했다. 그때 형이가 들어와서는 "야 나 쉬좀 싸도 되냐"했다. 나는 양치를 계속 했고 형이는 옆에서 쉬를 쌌다. 나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생각했다. 바느질 하는 어머니와 글 쓰는 아들, 씨뿌리는 아내와 밭을 가는 남편, 회초리 든 훈장님과 공부하는 아이들, 양치하는 나와 쉬 싸는 형이... 누가 토 달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풍경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을까 생각하며 새삼 8년이라는 시간의 힘을 실감했다.


다음날 우리는 국제 시장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요새 얘들을 뜸하게 보다 보니 간과한 게 있었는데, 우리의 외출 준비 스타일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나는 눈 뜨자마자 씻고 머리 말리고 약속 시간 한참 전부터 못 나가서 안달복달 하는 스타일이다. '혹시 버스가 늦게 오면?' '혹시 내가 길을 잘 못 찾으면?' '혹시 아기 고양이를 만나면?' 같은 여러 혹시를 위해 미리 집을 나선다. 하지만 우리의 친구들은 일단 아침에 일어나질 못한다. 겨우 눈을 뜰 힘이 생기면 핸드폰을 좀 들여다 봐야 되고 몸을 일으킬 힘이 생기면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좀 봐야 되고 걸을 힘이 생기면 비척비척 돌아다니면서 냉장고 문도 열었다가 안마의자에도 앉았다가 똥도 좀 쌌다가 해야 하고 왜 준비하는 데 노래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도 좀 틀고 모닝 요가로 몸도 좀 풀어야 한다. 그 날도 나는 준비를 다 했는데 마리와 형이가 스트레칭 한다고 다리를 찢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친히 180도로 찢어주고 싶은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불만스러운 것은 마리와 형이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필요이상으로 빨리 준비를 마치는 것을 막기 위해 "잠깐 여기 좀 앉아 봐라" "여기 요가를 좀 해봐라" "우리는 여행에 온 것이지 전지훈련에 온 게 아니다" "저 년 누가 안마의자에 묶어라" 하는 하소연과 협박을 했다. 언젠가 셋이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역시 술을 먹고-얘기해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고단스럽겠구나, 되도록 멀리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중)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부산로그 8.30

기차에서 한 다빈치코드. 매 판 꼴찌의 "야 한 판 더 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네 시간동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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