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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pr 29. 2021

더디 가세요

이십대 후반은 왜 이렇게 쥐새끼처럼 호다닥 뛰어가는 걸까

열네 살.


나는 나이를 헷갈려 본 적이 없다. 해가 바뀌는 1월에나 '아차 한 살 더 먹어 열 넷이구나'할 뿐 여름이 되고 가을과 겨울로 계절이 옮겨갈수록 더 똑똑히 내가 열 넷임을 기억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1년 내내 열넷이고, 1년은 아주 길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나는 어른들의 행동이 너스레 같기만 했다. 어른이 되면 누가 나이를 물어오는 일이 잘 없지만, 간혹이라도 누가 나이를 물으면 그들은 서랍 속에서 지난 겨울에 입은 옷을 찾는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뜸을 들이다 까먹은 영어 단어를 생각해낸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어디보자... 내가 올해... 쉰둘 쯤 되었구나"


어디를 볼 일이 뭐가 있을까. 일 년 내 쉰둘이었으면서 새삼스레 다시 헤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 나이에 으레 하는 농담 같은 걸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고 나는 머리 속을 헤집진 않아도 잠시 뜸 정도는 들여야 나이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여섯 살로 산 날이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돌연 스물일곱이 되고, 스물일곱도 얼마 안 가 개봉박두! 스물여덟의 시대가 왔으니 내가 몇 살인지 즉각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열네 살 땐 한참을 살고 또 살아야 겨우 열다섯이 되었는데 이십대 후반은 왜 이렇게 쥐새끼처럼 호다닥 뛰어가는 것일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뭔가를 도둑 맞은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쭈그려 앉아 무릎을 쓰다듬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간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해져서 천동설처럼 아무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곱씹어보면 아주 고약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소프트웨어도 하드웨어도 기능을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원래 말짱했던 몸과 정신이 나빠진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아니라고 한다. 원래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던 걸 번식을 위해 잠깐 좋은 상태로 만들었다가 번식할 나이가 지나면 '신경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신경을 쓰지 않으니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고.


우리 외할아버지가 들으셨다면 그 좋아하는 농담도 안 하고 입을 꾹 다물 만큼 씁쓸한 얘기다.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그런 이치일까. 번식도 했겠다 볼 장 다 봤으니 시간 마저 아까워서 반 년을 꼭 한 달 같이 보내고, 일년을 꼭 반 년 같이 보내게 하는 것일까. 자연의 인심이 그 정도라면 정말 고약하다.


박완서 작가는 에세이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 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정말 그렇다. 시간으로 악운도 재앙도 해결해 또 살게 하고, 그렇게 살게 하다가 나이가 들어 쓸모가 없어지면 시계를 점점 빠르게 돌리는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우리의 엉덩이를 뻥 차버리겠지. 나는 괜히 엉덩이를 문질렀다.


"쥐새낀 줄 알았는데 씹새끼였어..."


내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고 옆에 있던 엄마는 놀라 바라보며 등짝을 때렸다. 우리 엄마는 몸 전체가 몽글몽글 말랑말랑한 순두부 같은 사람인데 그래서 때려도 하나도 아프지가 않다. 나는 정왕동 솜주먹이라고 놀렸고 엄마는 그런 나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다시 멸치볶음인가 오뎅볶음인가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후천적으로 닮아버린 엄마의 거북목을 보며 생각했다. 나보다 30년은 더 산 엄마의 시간은 얼마나 빨리 흐르고 있을까.


엄마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새학기에 새로운 교실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일주일이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직을 해서도 처음 하루, 일주일은 얼마나 더디 가는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하면 뇌가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느라 허투루라도 흘려보내는 시간이 없기 때문일까.


엄마와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하면 시간이 조금 더디 가지 않을까. 멸치볶음도 오뎅볶음도 주방도 다리미도 청소기도 익숙한 것들은 떠나보내고 엄마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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