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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pr 19. 2021

그냥 그런 손녀

손자손녀들은 할머니의 욕바가지 속에 무럭무럭 자랐다.

20년 넘게 함께 살았지만 할머니에게 살갑게 군 기은 없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무슨 맘 상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띄엄띄엄 거리를 두는 내 성격이 혈육에게까지 작용한 까. 그럴 수도 있겠다.


혹은, 내가 기대한 '할머니다움'이 우리 할머니에게는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 <미나리>를 보면 재미교포인 꼬마애가 처음 만난 할머니에게 그런다. (할머니는 한국에 있다가, 아이들을 돌봐주러 미국에 날아온 설정이다.)

"할머니 쿠키 구울 줄 알아요? 쿠키도 못 굽는 할머니가 어딨어." (정확하지 않지만 대강 이런 대사였다.)

남자애는 쿠키를 구워주는 대신 고스톱을 알려주는 할머니를 가짜 할머니라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 할머니의 디폴트는 고스톱이지만, 미국에서 자란 아이의 정서에는 쿠키+푸근함+뜨개질+.. 등이 할머니다움의 디폴트였을 것이다. 내게도 이런, 어디서 주입됐는지 모를 할머니다움에 대한 디폴트가 있다. 엄마, 아빠가 야단을 쳐도 할머니만은 내 편이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옛날 얘기를 들려주시고, 허허 웃으며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는 그런 이미지...


생각해보면 그런 이미지는 K-드라마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생각 든다. "어이구 우리 똥강아지들~"하며 손자손녀를 반기는 일일 드라마속 할머니를 무의식 중에 얼마나 많이 본 걸까.


아무튼 우리 할머니는 내가 지향하는 할머니다움과는 확실히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자식들로는 큰아빠, 우리 아빠, 고모가 있다. 우리 엄마는 아빠가 장남이 아니니 시부모 모시고 살 일 없으리란 생각에 시집왔으나, 큰아빠네가 이혼이니 뭐니 하는 풍파를 겪느라 부모 모시고 살 겨를이 없고, 엄마 아빠도 IMF에 집안이 휘청거리자 결국 대구에 있던 집을 팔고 서울에 있는 시부모와 집을 합치게 되었다. 그게 내 나이 10세 때이니 엄마는 2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있다.(할아버지는 집을 합친지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내 나이 13세가 되었을 때 우리는 경기도 어느 동네로 이사를 했다. 애미 없이 자식 키우고 있을 큰 아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할머니는 큰아빠네도 우리집 근처로 불러들여 살게 했다. 그때 우리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이리  살아라 저리 살아라 할 만큼 권위 있고 기세 좋은 사람이었다. 풍채까지 좋으셨으니 그땐 여장부 같은 포스가 줄줄 흘렀다.


큰아빠의 자식들로는 딸 둘이 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 언니들은 공부 안 하고 용돈 타다 홀랑 써버리기를 인생 최고 재미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와 다툼..이라기보다 할머니의 일방적인 쌍욕과 후두려치기를 자주 겪다.


"야이노무 쌍년들아 너거는 돈 십만 원을 타간지가 언젠데 또 돈이 없다고 지랄이냐 어? 느들 아부지는 느그 키운다고 쎄빠지게 일하구 어?볼 때마다 삐쩍삐쩍 말라가지구 할미 가슴이 찢어지는데 너거들은 딸년들이라는 게 그저허~ 볼 때마다 돈 달라는 소리만 해쌓고... 뭐? 이노무 쌍년아 작은 아빠가 줄 돈이 어딨냐 어? 돈을 맽겨 놓은 줄 알고 이 썩어빠질 년들..."


전화로든 면전에서든 언니들만나기만 하면 할머니는 이와 같은 대사를 읊었다. 우리 아빠 쪽인 최가 식들은 대체로 목청이 좋아 만나기만 하면 단순한 안부 인사도 재산 다툼 난 사람들처럼 핏대세워 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할머니 목청이 으뜸이었으니 저 욕지거리는 언니들뿐 아니라 온 가족이 었다. 그렇게 생생한 딕션으로 반복 청취한 결 이렇게 10년이 지난 때에도 막힘없이 글로 줄줄 쓸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아무튼 우리 할머니 성질이 이랬으니 나는 살갑게 간식을 달라고 아양을 떨거나 돈 천 원이라도 타갈 엄두를 못 냈다. 할머니 슬하의 손자손녀들은 불호령과 욕바가지 속에 무럭무럭 자랐고, 할머니는 그 기력을 다 쏟아내느라 차츰차츰 늙어갔다.


그렇게 올해로 할머니는 95세가 되었다. 90이 넘어서도 할머니는 시간 떨어진 교회도 혼자 다녀오시고 노인정도 매일 같이 가셨다. 그런데 코로나로 그런 소일거리도 없어지고, 얼마 전에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고관절을 다친 후엔 눈에 띄게 기력 없 누워만 있게 되었다.


종일 누워 있는 할머니는 불과 몇 년 전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온갖 '년'자 돌림 단어를 구사하던 때의 할머니와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전에 없이 할머니가 안쓰러웠고, 심란해지기도 했다.


이 상황이 누구보다 심란한 건 아빠였고, 그래서인지 내게 살가운 손녀 노릇을 원하는 듯보였다. 할머니가 너네 보고 싶어서 금요일마다 "애들 이번 주엔 오냐? 다음주에 오냐?" 물어보신다, 할머니한테 가서 도란도란 얘기도 좀 하구 그래라, 할머니가 너네 치킨이라도 사 맥이라고 성화시다, 할머니 주무시기 전에 가서 인사도 하고 이부자리도 봐드리고 그래라...


아빠는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얼마나 애달프게 보고파하시며, 그런 마음에 화답하여 나와 동생이 할머니에게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는지 은근히, 그러나 꾸준히 어필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아빠가 내 손을 잡아 끌 때마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할머니에 대한 연민과 상관 없이, 할머니의 싫은 모습은 여전히 싫었다. 엄마가 손 다친 줄 알면서도 잡채가 먹고 싶다고, 사온 잡채는 뻐덕뻐덕해 안 먹겠다고 해 굳이 며느리에게 잡채를 받아 먹는 게 싫었고, 며칠이라도 고모네 집에 가 계시라는 청에도 바득바득 이 집에 있겠다며 아들 며느리가 며칠 여행이라도 가꼴을 못 보는 그 고집이 싫었다. 그 마음을 참아가며 넉살 좋은 손녀 행세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과,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마음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전자는 책임감과 인간된 도리의 영역이고, 후자는 호감과 감정의 영역이 아닐까.


전자가 그 사람이 내게 해준 것, 오래 함께 한 시간에 의해 생긴다면, 후자는 서로 말이 통한다는 느낌, 즐겁게 보낸 경험에 의해 생기는 게 아닐까. 전자가 명분에 가깝다면 후자는 자연스레 마음이 가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내게 할머니는 명분은 있지만 차마 기꺼이 다가가지는 않게 되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염원한다고 해서  마음이 홀랑 뒤집어지지는 않다. 같은 반이긴 하지만 서로 서먹하니 친구는 아닌 아이들처럼, 나도 할머니와 한 식구지만 그저 아침 저녁으로 인사나 하는 그런 사이 것이다.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쩐지 내 성격의 치부를 밝히는 것 같아 입을 다물어왔다. 하지만 어떤 관계든, 할머니와 손녀일지라도, 당연히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그냥 편하게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손녀도 아니고 몹쓸 손녀도 아니고 그냥 그런 손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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