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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Dec 08. 2020

백야의 지평선

언젠가 분명 잠들겠지만 나는 아직 깨어있었다.


30분 정도 일찍 왔더니 으슬으슬 춥다. 반팔 아래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늦게 퇴근해서 집에 들르기엔 시간이 애매해 바로 왔더니 이렇다.

홍제천 가를 어슬렁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시 되기 3분 전.

버드나무로 슬금슬금 가 '열쇠 가지'를 더듬더듬 찾았다.

버드나무 가지 속에 금속으로 된 가지가 숨겨져 있는데 그게 열쇠 가지다.

열쇠 가지를 당기면 버드나무 밑둥이 벌어지며 계단이 나온다.

1년 중 5, 6, 7월 세 달동안, 밤 10시 이후에만 열린다.


10년 째인데도 열쇠 가지를 한 번에 찾는 일은 드물다.

오늘도 한참을 버드나무 가지들 사이에 머리를 쳐박고 있었다.

손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찾았다'

열쇠 가지를 힘껏 당겼다.

밑둥이 열리고 돌계단이 나왔다.

돌계단 양 옆으로는 노란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머리 위에서 문이 닫힌다.

가로등과 계단, 곧 나올 고린의 가게 모두 중세 유럽 같은 느낌을 준다.

고린의 가게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순간이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먼 지역으로 갈 수록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

나는 고린의 가게에서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먼 곳에 가야 한다.

거의 20실링에 가까운 돈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가까운 곳은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10년 차 이상은 꼭 가야했다.


북극에.


-


고린의 가게를 열고 들어가니 여느 때와 같이 먼지가 많고 여전히 퀴퀴했다.

고린은 앞마당에서 쿳을 직접 키우고 그걸 정성스레 말아 핀다. 쿳은 대마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파랗고 큰 몸에 사람 얼굴만한 앞발로 쿳을 얇게 마는 고린을 보며 '저것도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이동 업은 이 세계에선 공무 수행 같은 건데도 고린은 대범하게 매일 같이 쿳을 핀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고린이 쿳도 피지 않고 헤롱거리는 기색 없이 프런트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20실링을 건네며 내가 말했다.

"고린, 북극"

고린은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앞발로 20실링을 느릿느릿 가져갔다.

그러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고린이 드디어 쿳을 너무 많이 피워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티켓이랑 거스름 돈 안 줘? 무슨 일 있어?"

고린은 발톱으로 동전을 뒤적거리더니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나는 그냥 전달하라고만 지시 받은 거야."

"뭔데?"

"요지는... 니가 나한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거지."

"아 뭔데?"

고린은 그러고도 조금 더 뜸을 들였다.

내가 벌떡 일어나자 그제야 고린은 말을 이었다.

"키노 궁전이랑 한 계약 말이야."

"계약? 이 일 시작할 때 한 계약?"

"그래. 그 계약 조건 중에... 키노에서 거짓이라고 인정한 부분이 있어."

"무슨 소리야? 뭐가 거짓인데?"

"이건 계약 위반에 대한 위약금이고."


고린이 꺼내놓은 실링 뭉치는 한 눈에 봐도 액수가 꽤 돼 보였다.

일에 필요한 순간 이동 비용도 지원하지 않는 키노가 이렇게 큰 돈을 준다고?

순간 깨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이라고 인정한 부분... 그 부분이 어느 조항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를 끄고 프런트에 바짝 붙어 섰다.

"뭐가 거짓이냐고."

"예상했겠지만... 키노와 계약을 맺어 10년 이상 일한 자는... 죽음을 면해준다...는 그 조항. 거짓말이야..."


-


나는 15살 때부터 키노와 계약을 맺고 일했다.

처음 계약한 건 어느 봄, 밤 10시였다.

나는 창문을 열고 침대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었다.

키노 궁전에서 일하는 수행 비서 코웰이 창가에 찾아왔다.

코웰은 날 수 있었지만 비행 생물이라기보다 흡사 해양 생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해양 생물들이 물 입자와의 저항을 이용해 헤엄치듯, 본인은 공기 입자의 저항을 이용해 공기 중을 헤엄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처럼 발이 있진 않아서 코웰은 착지할 수 없었다. 평생 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코웰이 착지하는 날이 코웰이 죽는 날이다.

코웰은 창가에서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조금 졸린 상태였고 그래서 당연히 꿈일 거라 생각하며 서류 봉투를 받았다.

서류에는 키노와의 계약에 대한 내용이 써 있었다.


- 키노(갑)와 백야진(을)은 계약 관계를 맺는다.

- 을은 1년에 세 달(5~7월) 동안 일한다.

- 을은 5~7월에 매일 밤 10시, 홍제천 87번 째 버드나무로 출근한다.

- 을은 출근 후 갑이 지정한 장소로 이동해 마졸린을 50마리 제거한 후 퇴근한다.

- 갑은 을에게 노동의 대가로 매 월 3000실링을 지급한다.

- 을이 갑과 10년 이상 계약을 유지할 시, 갑은 을의 죽음을 면해준다.

- 계약을 위반하는 쪽은 10만 실링을 위약금으로 상대방에게 지급해야 한다.


키노는 뭔가를 알고 접근한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죽음을 생각하느라 잠 들지 못 하고, 죽음이 무서워 거의 매일 밤 울던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웃고, 떠들고, 걸어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게 신기했다.

끽 해야 몇 십년 더 살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데. 사람들은 그걸 잊거나 외면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죽은 뒤에도 10년이 흐를 거고, 100년이 흐를 거고, 만 년이 흘러 인류가 없어지고, 몇 억 년이 흘러 생명체가 없어지고, 지구가 없어지고, 태양계가 없어지고, 그리고도 한참이 흘러 지구와 비슷한 어떤 행성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이 생길 거고, 그 행성에서도 10년이 흐르고 100년이 흐르고, 인류와 비슷한 것이 생기고... 그 수많은 날 동안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을 끝없이 하다 보면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한 무서운 느낌이 들어 무릎을 끌어 안고 울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맞는 아침은 평범하지 않았다. 찬 공기나 하늘 같은 것들이 누구에게 잠시 빌려온 것처럼,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밤을 점점 더 자주 보냈고, 부모님은 걱정했다.


그러던 때에 키노에게 계약서를 받은 것이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도 있는데 내가 죽지 않게 해 줄 신 같은 것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땐 실링은 뭔지 모르겠고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키노와 계약했다.


-


나는 계약하는 순간부터 은근히 짐작하고 있었을까. 그 조항이 거짓이라는 걸.

그런 줄 알면서도 속는 셈 친 걸까.

나는 눈 앞의 10만 실링을 바라봤다.

고린은 원화로 바꿔줄 수도 있다는 말도 조그맣게 덧붙였다.


자그마치 10년을 일했다.

일하는 대가로 월에 3000실링 씩 준다는 건 뭣도 아니었다. 순간 이동 비용, 마졸린 제거용 활, 무기 수리비, 안전 장비, 야식 등등에 돈을 쓰다 보면 500실링도 남지 않는 달이 허다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때문에 10년을 일했다.


그런데 이제와 거짓말이라니.

10년간 나를 떠나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하루도 날 떠난 적 없던 것처럼 익숙한 감각으로 느껴졌다.

10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고린에게 말했다.

"키노 궁전에 가야겠어. 키노로 이동할게."

"안돼. 노동자들은 할당된 마졸린을 잡기 전엔 키노 궁전으로 갈 수 없어."

"왜!!! 지들은 마음대로 계약 위반하면서 나는 왜 안 돼!!"

나는 화가 폭발해서 프런트를 내리쳤다.

고린은 그 큰 앞발로 얼굴을 감싸며 갸냘프게 외쳤다.

"나한테 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면 안돼! 화내지 않기로 했잖아, 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그래, 너도 거짓말인 줄 알고 있었지? 다 한 통속이지? 너는 그게 문제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너는 생각할 줄 몰라? 옳고 그른 거 몰라? 니가 생각할 때 잘못 됐으면 위에서 시켜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는 넌! 너는 이 계약이 옳다고 생각해서 했어? 죽기 싫은 그 욕망 때문에 한 거면서!"


고린이 이렇게 말을 잘하다니. 쿳만 안 피면 멀쩡한 놈이었다.

나는 잠시 고린의 반격에 주춤했다가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을 이었다.

"상관 없어. 어차피 잡은 마졸린을 제출하러 일 끝나고 키노 궁전에 가야 하니까."

"그러시던지."

10년 동안 고린이 이렇게 얄미운 적이 없었는데... 한 대 치고 싶었지만 내 얼굴만한 고린의 앞발을 보며 화를 추슬렀다.

나는 북극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


북극. 밤 11시.

정확히 말하면 고린의 가게는 공간만 이동시켜주는 게 아니다.

12시간 과거로도 이동시켜준다.

그래서 북극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한국과 같은 밤 11시인 것이다. (한국과 북극의 시차는 12시간이다.)

시간 이동이 없었다면 북극은 낮 11시였어야 한다.

10년간 매일 밤 사냥을 하면서 학교도 다니고 회사도 다닐 수 있었던 비결이다.

북극에서 12시간을 사냥을 끝내고 고린의 가게로 가도 여전히 밤 11시여서 나는 집에 가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다.


이 계절에 북극의 밤은 하얗다.

북극은 5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딱 내가 일하는 세 달 동안 백야다.

내 입장에선 좋다. 사냥하기엔 아무래도 환한 게 나으니까.

이제 마졸린을 사냥해야 한다.

마졸린은 산호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산호처럼 예쁘진 않고, 밀가루 반죽 같은 질감에 땅을 질퍽거리며 굴러 다닌다.

촉수에는 수많은 빨판이 있어 바위나 벽에 붙기도 한다.


키노에서 마졸린 제거를 의뢰한 이유는 마졸린이 '허무'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마졸린과 허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도 안전 장비 가게에서 산 탐지용 안경을 써야 볼 수 있다.

허무는 보통 바닥에 안개처럼 낮게 깔려있다.

마졸린이 활개를 치게 놔두면, 공기중에 퍼지는 허무가 너무 많아져

극단적으로는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님 키노에서 흘린 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키노가 마졸린을 제거하는 취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죽음에서 건져준다는 것, 그거 하나만이 중요했는데. 이젠 그것마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졸린을 잡을 의욕이 뚝 떨어졌다.

나는 활과 보호 장구들을 벗었다.

눈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설피도 빼고 걸으니 발이 푹푹 빠졌다.

북극에선, 특히 백야일 때는 선크림이 필수다. 햇빛이 눈에 반사되고, 그 빛에 피부가 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일 기간에 선크림을 항상 박스로 사뒀는데, 이젠 그런 것들도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을 때는 백년천년 쓸 피부라고 생각해 나빠지지 않게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제 그렇지 않게 되었으니, '100년도 못 쓸 이 피부. 좀 나빠지든 말든 알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 장구 없이 허무를 그대로 들이마시고 있어서 그런가. '어떻게 되든...'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허무를 마시기 전에도 나는 원래 이런 식이었다.

'모두 죽는데 왜 다들' '저렇게 아등바등' '무엇을 위해' 그런 생각이 들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나는 등을 대고 누웠다.

태양은 지평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백야 기간에 태양은 밤새 지평선에 가까워지기만 하고 지평선을 넘진 않는다.

죽음은 백야의 지평선 같은 것이었을까.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것. 나는 그 불가능한 것을 바랬던 걸까.

다시 죽게 되었으니(사실 죽지 않게 된 적도 없지만) 나는 다시 무서워질 것이다.

잠시 사라졌던 죽음의 공포를 또 매일 밤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게서 무서움이 사라졌던 적이 있긴 한가?


-


키노와 계약한 날 밤, 나는 잠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나는 100년 후에도 만 년 후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내게서 '무'의 두려움을 거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영원히 존재하는 나.

1000년이 지나고 만 년이 지나고 수십 억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반복해서 겪고, 인류와 지구가 끝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차갑고 어두운 우주에서 다른 생명체를 만날 때까지 긴긴 시간을 버텨야 할 것이다.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지쳐버리지 않을까.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는 순간이 오진 않을까.

존재하지 않을 나를 생각하는 것만큼, 언제나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두려움에는 출구가 없었다. 죽든 살든.

나는 그 밤을 기억하지 않기로 했고, 정말로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


그렇게 키노와 계약한 밤을 나는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밤을 기점으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가 나를 속인 거였다.

어떻게 해도 두려움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기억을 지운 것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새벽 2시였는데도 세상은 환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린 나는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 환한 세상도, 살아야 할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나도.


회색과 주황색이 섞인 하늘 위로 새가 날았다.

바다 건너편에는 마을이 있었고, 사람들이 조그맣게 보였다. 이래봬도 새벽 2시인데 저들은 잠들지 않고 무슨 일로 돌아다니고 있을까.

물론 잠들지 않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지.

새삼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도 낯설게 느껴졌다.

언젠가 분명 잠들겠지만 나는 아직 깨어있었다.

지구 어느 곳에는 밤이 와도 어느 곳은 잠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는 아직 영원히 잠든 적이 없다.


나는 눈 속에 파묻었던 손을 꺼내 보았다. 그제서야 동상에 걸릴 것처럼 얼얼한 기운이 느껴졌다.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어떤 증거처럼 여겨졌다.

아무것도 아직 잠들지 않았다.

죽는 것과 사는 것, 그 사이에서 나는 아직 깨어있었다.

깨어있다는 감각은 내게 기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엔 또 무언가가 무서워 무릎을 끌어 안고 울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깨어있다는 이 감각을 잊지 않으면 나는 온전할 것 같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 아래에는 여전히 허무가 짙게 깔려 있었다.

허무를 뽀득뽀득 밟으며 백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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