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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01. 2021

주말

여기 날 가두어 주오

나는 격주로 다른 곳에서 주말을 보낸다. 한 주는 서울 집에서, 그 다음  주는 본가에서, 또 그 다음 주는 서울 집에서, 또 그 다음주는 본가에서. 부모와 라마, 양측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한 주라도 더 서울에 있으면 부모의 원성이 자자하고, 한 주라도 더 본가에 있으면 라마의 애달픈 카톡이 자자하기 때문에 나는 이 밸런스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본가에 내려가는 주에는 2호선이 아닌 4호선을 탄다. 터덜터덜 종점까지 실려오면 그곳에 내 본가가 있다.


보통 저녁 9시 쯤에 본가에 도착한다. 우리 집은 21세기 희귀종으로 지정된 '도어락 안 쓰고 아직도 열쇠  쓰는 집'이어서 벨을 누르고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흥선대원군이 지문 인식 도어락을 쓰는 날에도 우리 집아마 열쇠를 고집할 것이다.


곧 척화비 같은 문이 열린다. 그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에게는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다년 간의 사회생활로 쌓은 시민의식과 사회성은 말끔히 사라지고 철부지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 신호탄 같은 것이 바로 엄마 부름이다. 엄마는 문을 열며 "우리 밍밍이 왔어~"라고 한다. '밍밍이'란 서른이 임박해오는 나를 지칭하는 것이고 다 커서 붙은 칭이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굉장히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이 마트 장난감 코너에 누워 탑블레이드 팽이 쟁취를 위한 투쟁을 벌 때도 나는 뭘 갖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는 말을 하 적이 없었다. 부모조부모가 슈퍼 데려가서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할 때도 나는 "괜찮아요", "안 사주셔도 돼요"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재경이(우리 엄마)가 늙은일 낳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시절에 왜 그랬을까 떠올려보면, 돈 쓰면 안 되고 부모 고생스럽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경제 관념과 유교 사상을 습득했는지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에 다닐 때도 대단히 모범생이었어서 담임 선생님이 "빵떡이 같은 학생만 있으면 선생할 맛 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주관 없고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학생이란 소리 지만, 그때는 대단한 칭찬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더욱더 모범생 짓에 매진했다.


러던 것이, 응석에도 늦바람이 있는지 본가에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철부지 짓이 슬슬 시작되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예컨대 수 틀리면 '밍!'하는 소리를 는 그런 것... 세상에서 그 짓을 귀엽게 봐주는 유일한 인류인 엄마는 그때부터 나를 밍밍이라고 불렀다.


그 후로 나는 본가에 방문할 때마다 진화론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족보행을 포기하고 음식을 도구 없이 손으로 날름 집어 먹으며 완성된 문장보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사용했다. 한 명의 '짱아'가 된달까...


엄마 옆에 달라붙어서 구석구석에 붙은 살을 찾아 꾹꾹 누르거나 누워있는 아빠 팔베개를 해달라고 한다. 그럴 때면 아빠는 다년간의 팔 노동착취가 익숙한 듯 맥없이 팔을 내어준다.


"아빠아"

"응?"

"나 머리 마사지해줘"


아빠는 이 새로운 요구를 수용해야 할지 말지 고민한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는듯 끄응.. 신음한 후 그나마 자유로웠던 왼팔로 딸의 머리를 정수리 주변부터 꾸욱 누르기 시작한다.


"하는 짓이.. 아주 흉측해졌어..."


나는 못들은 척하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이 완벽히 평화로운 시간을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다. 홀한 자발적 퇴보...


생각하는 것도 단순해진다.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기분이 안 좋다. 그러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면 활기에 차서 빵댕이를 흔들어재끼며 집안을 뛰어다닌다. 밖에서는 누구라도 내게 관심을 주면 손사레에 뒷걸음질 치기 바쁘지만 이 집에만 오면 온 가족이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려 안달이다. 그러나 부모는 이미 딸이 이러는 것에 익숙해져 그 옆에서 가계부도 쓰고 빨래도 널고 장인어른 생신에 용돈을 얼마나 드릴 것인지도 논의한다.


그렇게 한바탕 해재끼고 나면 속이 허하여 부엌 여기저기를 뒤적거린다. 내가 먹고 한 번이라도 맛있다고 한 주전부리는 모두 구비되어있다. 누가 나를 석 달만 이 집에 가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렌지와 상투과자와 요플레를 집어든다.  


그걸 이리저리 까먹고 디비 누워있다 보면 아빠가 내 머리 맡에 있는 요플레 뚜껑이며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주우며 한 소절 뽑기 시작한다.


"아하주우 훌-륭하신 따님을 둬가지구- 요플레를 잡숫고 요롷게 뚜껑을 따하악- 놔두고오 아빠가 올 때까지 고대해-로 치우지도 않고오 어쩜 이리 이쁠까아 우리 딸래미이-"

"이따 치울라고 해써어.."


나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고 이불을 돌돌 말아 누웠다. 이 집에서 나 양심 빼고 다 ...


사회에서 쓸모있다고 취급받는 모든 능력 떼어 내고 무슨무슨 매니저라는 호칭도 떼고 나를 밍밍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달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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