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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05. 2021

포테이터블 룰스

1. 밤에 자고 아침에 깬다

어느 적적한 주말 오후. 나는 방석 세 개를 겹쳐 베고 누워 티비를 보고 있었다. 동생 효석은 등을 바닥에 대고, 다리는 쇼파에 올리고 누워 쿠키런을 하고 있었다. 새벽에 출근해 오후에 퇴근하는 아빠는 방금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러 들어간 참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 제 할 일을 하는 나른한 시간이었다.


그때 아빠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 전화 좀 대신 받아줘~"

아빠가 화장실에서 소리쳤고, 우리 집의 효도와 재빠름을 담당하는 효석이 끙차 하고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네, 전화받았습..."

효석이 두 어절을 마치기도 전에 스마트폰 너머로 짜증이 북받친 괄괄한 목소리가 들렸다. 효석은 중간중간 "아니 그게.."하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괄괄한 목소리는 일방적으로 소리 쳤고 효석은 상기된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다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야"

"주차를 왜 이렇게 해놨냐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해놨는데"

"몰라 뭐... 수도관에 자기들이 공구리를 쳐놨는데 거기에 주차하면 어떡하냐고... 깨지면 책임질 거냐고..."

"공구리치는 게 뭐야"

"나도 몰라"


효석은 심상한 얼굴로 '공구리치다'를 검색했다. 공구리는 콘크리트의 일본식 발음이며, 공구리치다는 시멘트를 발랐다, 정도의 뜻이라는 걸 추측할 때쯤 아빠가 개운한 얼굴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무슨 전화야?"

효석과 나는 심각한 얼굴로 주차... 공구리... 책임.. 하며 설명했다. 아빠는 듣더니

"이따 또 전화 오면 빼주지 뭐"

하고 냉동실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신중히 골랐다.


나는 반듯하게 앉아 생각에 빠졌고 효석은 주방과 거실 사이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효석은 중간중간 아빠의 핸드폰을 심각하게 들여다 보다가 이윽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아빠가 차 대놓은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세상 개운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차 주인과 달리 나와 효석은 약간 똥이 마려운 듯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효석을 쳐다봤고 효석도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종종 쌍둥이다운 어떤 교류를 경험한다. 나는 효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효석은 지금 이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공구리 아저씨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우리 집으로 쳐들어온다거나(물론 우리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모르시겠지만..) 공구리가 깨져서 우리가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거나 아빠와 공구리 아저씨가 싸움이 붙어서 한 사람은 병원으로 한 사람은 경찰서로 간다거나...


효석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이에 어떻게 대비할지까지 머리 속으로 계산해두는 신묘한 능력을 지녔다. 한 성격하는 아빠 때문에 이런저런 난감한 상황에 휘말렸던 기억 때문인지, KTX가 무궁화호 앞지르듯 효석의 걱정은 항상 현실을 저만치 앞섰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전전긍긍하기로는 나도 효석 못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를 걱정함에 있어서는 우리의 생각이 신통하리만치 잘 통했다.


다행히 공구리 아저씨가 쳐들어오거나 우리를 소송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효석은 "또 우리만 걱정했지 또..."하며 서로의 고쳐지지 않는 습관을 책망했다.


나는 걱정이 많은 것에 비해 딱히 뭔가를 대비하거나 계획하진 않아서 "그 인생 참 속 편하구나" 하는 얘기를 듣는다. 하지만 나는 속이 편한 게 아니라, 속이 불편한 채로 드러누워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느 편이 더 한심한가 하면, 그런 가치판단은 하지 않기로 한다.


특히 자려고 누우면 걱정이 봄날의 벚꽃처럼 만개다. 가장 많이 하는 걱정은 내게 아주 거대하고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내가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심약하고 여린 마음으론 누가 지나가다 툭 치는 정도의 일에도 와앙 울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불운한 시절에 대비하여 몇 가지 규칙을 정하기로 했다. 어떤 큰 불행에도 이것만 지키면 아주 망가지지는 않을 규칙을 정하고 싶었다. 영화 <마션> 보셨는가. 화성에 고립되어서도 한 알의 감자를 키우던 맷 데이먼처럼, 나도 힘든 때에도 감자와 같은 희망을 키우고 싶었다. 작가 이슬아가 <마션>의 맷 데이먼을 'Potatoable Man(감자적인 사람)'이라고 부른 것에 착안하여 나의 규칙도 'Potatoable Rules(감자적인 규칙)'라고 이름 붙였다. 일단 일곱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포테이터블 룰스 1. 밤에 자고 아침에 깬다

이런저런 걱정에 늦게 잠들고,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고, 그럼 또 밤에 잠이 안 오고, 그럼 또 늦게 일어나고, 늦게 일어나면 자괴감이 들고, 자괴감에 밤 잠을 설치고, 또 늦게 일어나고... 이 무한굴레에 빠지면 합병증처럼 다른 문제들이 들러 붙는다.


때문에 새벽 1시 전에는 반드시 잠들어서 아침 9시 전에는 깨는 게 좋다. 자려고 누웠을 때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생각나면 그 밤에 드러누워서 해결책을 떠올리려 하지 말고 일단 잠을 자자. 밤에 느끼는 이유 없는 우울감은 잘 자고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해결될 때가 있다. 나는 잠이 안 오면 길고 조용한 명상 영상을 틀어 놓는다. 코로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뱉고 그런 걸 따라하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기도 하다.


낮에는 되도록 자지 말고 깨있는 게 좋다. 낮에 자면 밤에 잠이 안 온다. 자더라도 시간 이상 자지 말자. '할 일도 없고 졸린데 그냥 자지 뭐...'라는 생각이 든다면, 깨어 있는 게 할 일이라고 생각하자. 노래라도 부르고 인덕션이라도 닦으면서 잠을 쫓는 것이 내 할 일이다, 생각하자.


포테이터블 룰스 2. 음악을 듣는다

'이걸 해서 뭐해...'라 생각이 들면 모든 일이 부질없 느껴진다. 뭘 좀 열심히 하려다가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하며 포기한다. 그런 무기력증 속에서도 음악 듣는 일 정도는 할 만하다고 느껴진다. 어차피 노래는 가수가 부르는 거고, 내 귀는 열려 있으니까. 아주 허들이 낮은 활동인 것이다. '책을 보시오', '운동을 하시오' 같은 건 무기력자에 너무 가혹하지만, '음악을 들으시오' 정도 아주 가능다.


나는 '짙은'의 '백야'를 시작으로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유사한 음악을 이것저것 듣는다. 노래의 서사에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도 안 들고 마음이 안정되면서 뭔가 해볼 만한 에너지가 생기기도 한다.


포테이터블 룰스 3. 하루에 한 번 산책을 한다

아주 효과가 좋은 활동이다. 꼭 연두빛 낭창한 공원이나 숲길이 아니어도 일단 집 밖으로 나는 것이 중요하다. 동네 한 바퀴든 마트 구경이든 30분 정도 걷다 들어온다.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 세상과 아주 단절되는  막을 수 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물건을 사고 팔고 뭔가를 먹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이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큰 일이 난 줄 알았는데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더불어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훨씬 나아진다.


포테이터블 룰스 4. 불확실한 것을 컨트롤하려 하지 않는다

'망하면 안돼.. 으으 절대 안돼...!'라고 생각하던 것을 '왜 안 돼..?' '그냥 망하자..'고 놔버릴 때의 후련함이란...


내가 어떻게 못 할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상사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미루듯 스윽 미루자. 그럼 스트레스와 에너지가 크게 줄고, 절약한 에너지를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에 쓸 수 있다.


나의 지인은 '생각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생각'을 위한 쓰레기통을 상상한다고 했다. 상상의 종이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적어서 상상의 쓰레기통에 버리면 뭔가를 떠올리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고.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땐 인천공항에 배 들어오는 소리하고 있네...하고 은근한 멸시의 눈빛을 보냈지만 어쩐지 가끔 그 방법을 써먹게 다.


포테이터블 룰스 5. 하루에 한 번 웃는다

웃을 자격이 없거나 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다. 진실은 그 반대다. 내가 웃기 위해 세상이 존재한다. 가끔은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았다면 의식적으로라도 웃. 세상에는 취업률 역대 최저, 고독사 증가, 경제 성장률 감소 같은 이야기 말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다는 걸 기억하는 방법이다.


'무한도전 클립 영상', '신서유기 레전드' 같은 걸 검색해서 30분 짜리를 찾아 틀어놓고 크게 깔깔거리며 웃자. 가능하다면 박수도 치고 책상도 두드리도록 하자.


포테이터블 룰스 6. 남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 상황이 나쁘면  혼자 꼬아서 추측할 때가 있다. '저 사람, 날 보면서 되게 쌤통이라고 생각하겠지', '내가 불쌍하겠지', '나는 루저고 자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 보통 나처럼 심사가 비비 꼬여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잠시 뿐이다. 나를 포함 보통 사람들은 남이 나락에 떨어진 것에 유감을 표하다가도 내 손에 일어난 거스러미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니 괜히 의식하며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 그러는 사이 남들은 벌써 나를 잊었다.


포테이터블 룰스 7. 해결책을 찾는다

딱히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들이 보통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는다고 기똥찬 수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인생이 도난당하는 것을 끔뻑끔뻑 눈 뜨고 지켜보는 것 보단 다.


같은 문제 상황이라도 '문제!' '난 해결할 수 없어..' '무능력한 나..'의 시궁창 하이패스 궤도를 타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해볼까'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쪽으로 발을 들이는 게 무기력과 자책감 피하기 좋다.


로써 일곱 번째 규칙까지 소개했다. 포테이터블 룰스를 실행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의미를 찾지 말고 그냥 일단 하는 것이다. '이걸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뭘 얼마나 잘 살겠다고'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일단 는 것다. 불운한 시절의 내가 괜찮은 시절의 나를 믿고 따라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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