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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08. 2021

새 인생 프로젝트

다시 돌아온 친구 인생 팔아먹는 글쓰기

빵떡, 마리, 형이, 열이는 한 달에 한 번 독서모임을 한다. 벌써 1년 넘게 하는 모임이다. 이 모임이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된 이유는 '독서'도 아니고 '모임'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에 있다. 그 보다 더 자주 보았다면 서로 조금 지긋지긋했을 수 있다.


그들 넷은 만날 때마다 너는 또 왜 늦게 왔니 왜 여기서 보자고 했니 그 버릇 언제 고칠 거니 넌 항상 그런 식이야 같은 말들로 모임의 성대한 막을 여는데 한 달이 지나면 또 까먹고 "보고싶다 얘들아~" 하며 애달파한다. 망각의 긍정적 기능으로 유지되는 모임이라 해도 좋다.


그날 독서모임의 아젠다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이었다. 빵떡은 "공포스러운 아젠다네.."하며 중얼거렸다. 빵떡은 거의 서른 해까지 기껏 배우고 노동하며 살아놨는데 도로 빼앗아간다는 것에 큰 공포를 느꼈다. 이제 겨우 먹기 싫은 음식은 편식해도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만나도 되게 되었는데 다시 원점이라니. 빵떡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너무 좋을 것 같애. 완전 싹 새로 살고 싶어. 인생 리셋하고 싶어."

형이는 두 손을 모아쥐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형이의 얘기가 놀랍진 않았다. 평소에도 이번 생이 망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냐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한 번도 생이 망해본 적 없는 마리와 열이는 그러게 왜그랬니 정도의 의문스런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형이는 생각이 들면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형이는 서울의 한 작명소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했다. 작명가는 형이의 이름과 태어난 날과 시간 같은 걸 조목조목 묻더니 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이름이 아주 안 좋아요"

"아니 왜요?"

"여자 이름에 '형'자가 웬 말입니까 예? 듣기에도 너무 싸납잖아요. 삼십 넘기 전에 바꿔야 합니다. 안 그럼 아주후~ 고생해요."

고생이라... 형이의 머리 속에 그간의 유구한 고생의 역사가 스쳐지나갔다. 어쩐지... 어쩐지 너무 인생이 험난하다 했어. 역시 이름때문이었구나. 형이는 삼십이 넘어 이보다 더 고생스러운 건 안 될 일이지 싶었다. 형이는 이참에 이름도 고치고 팔자도 고치고 지랄병도 고치자는 야무진 마음을 먹었다.


"형아"

"형이 아니야"

"뭐가"

"나 개명했어"

"또오또 족가튼 소리 하고 있네"

"진짜야 나..."

드라마틱한 침묵이 잠시 이어지고

"나.. 시은이야"

빵떡은 형이, 아니 시은의 얘기가 진실임을 감지하고 잠시 망연해졌다. 시은은 주변 사람들이 새 이름을 불러주어야 팔자가 바뀐다며 당장 형이가 아니라 시은으로 부르라고 닦달했다. 시은은 틀린 받아쓰기를 고쳐주는 선생님처럼 우리가 "형이야.."라고 할 때마다 "시은이!"라며 화들짝스럽게 정정해주었다.


빵떡과 마리, 열이는 그때마다 어버버 하며 "아.. 아 그래 시은이.." 하고 맥없이 정정했다. 그들에게 형이와 '형이'라는 이름은 이미 많이 얽히고 스며서 서로 잘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초면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어색했다.


형이가 시은으로 새 삶을 산지 몇 달이 지나고 넷은 독서모임으로 다시 모였다. 시은은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다.

"얘들아"

"?"

"나 헤어졌어"

모름지기 절친이라면 이럴 때 뭐어어? 말도 안돼 몬 소리야 걔가 뭐 잘못 했어? 너 괜찮아? 등으로 이어지는 반응을 해줘야겠지만 빵떡과 마리, 열이는 예견된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에 담백한 기분으로 "그랬구나.." 정도의 유감을 표했다.


"나 헤어졌다니까"

"오쪼라ㄱ... 아니.. 그래 들어나 보자... 왜 헤어졌는데"

길고 지리한 얘기의 결론은 술과 연애생활을 바꿔버렸다 뭐 그런 거였다.

"나 이렇게 된 김에 서른까지는 진짜 원없이 놀 거야. 서른 넘으면 놀고 싶어도 못 놀아"

"형ㅇ.. 아니 시은아, 너 대학교 2학년 때도 그 얘기했고 졸업할 때도 그 얘기했어. 고학년되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 회사 들어가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 근데 너를 봐라. 지속적으로 신명나게 놀고있잖니. 너 분명 서른아홉 되면 또 같은 소리한다. 마흔 넘으면 놀고 싶어도 못 논다구, 지금 실컷 놀아야 된다고..."

빵떡은 올곧은 충신처럼 그간 시은의 만행을 소상히 고했다. 친구가 더 적극적이고 진정성있게 놀아재끼는 것만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넷 중 재수없지만 맞는 말과 맞는 말이지만 재수없음을 담당하는 마리도 조곤히 얘기했다.

"시은아"

"?"

"이름 바꿔서 새 인생이 살아지겠냐. 술버릇을 뜯어 고쳐야지..."

장내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열이도 어떻게 쉴드쳐줄 수 없어 입만 뻥긋뻥긋거렸다. 시은은 친구들의 직언에 먹은 게 얹힌 사람처럼 '끙..'하고 돌아 앉을 뿐이었다.


그렇게 개명은 시은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지 못한 듯 보였고, 시은의 새 인생 살기도 요원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독서모임에 시은은 다른 플랜을 들고 왔다.

"얘들아"

"얘들아라고 부르지 마 무슨 말할지 이제 무섭다"

"애들아 내가 관상이 좀 쎈 것 같아"

갑작스런 관상 얘기에 갤러리들은 수근거렸다.

"쌍꺼풀이 있으면 인상이 좀 순해보일 것 같아"

시은의 새 인생 살기 프로젝트 2단계. 쌍꺼풀 수술이었다. 그런데 빵떡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마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근데... 쌍꺼풀 수술하면 인상이 더 강해보이는 거 아냐..?"

"그러게..."

이쯤되니 새 인생은 명분이고 그냥 쌍꺼풀 수술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다음 독서모임에 시은은 붓기가 덜 빠져 팅글한 눈탱이를 하고 나타났다. 예상대로 시은의 비주얼은 더욱 강력해졌다. 어찌됐든 더 강하고 늠름해진 건 좋은 거니까. 빵떡은 친구가 레벨업을 했다고 치기로 했다.


그 후로 시은은 원하던 새 인생을 살고 있을까? 아직도 틈만 나면 인생 리셋을 꿈꾸는 거로 봐서 그는 아직 원하는 인생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오늘도 그는 스케치북처럼 북 뜯어버리면 새 도화지가 나오는 인생을  바라며 그래도 30까지는 진탕 놀아야겠다는 진심어린 다짐을 하며 친구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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