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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y 22. 2021

고민 중독

고민의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사람처럼 하지 않아도 좋을 고민을 만들어낸다

인생을 위협하는 큰 고민이 없을 때 빵떡은 고민의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사람처럼 하지 않아도 좋을 고민을 만들어낸다. 카드 돌려막기하듯 몇 가지 고민거리를 돌려가며 하고, 그러느라 평안한 인생을 즐기지 못한다.


첫 번째 고민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 두 번째는 큰 고난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 번째는 정체성. 빵떡은 잠 들기 전이나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이 고민들을 하나씩 꼼꼼히 해본다. 언제나 뾰족한 결론 없이 '걱정해봐야 소용 없어, 책이나 많이 읽자'고 마무리 짓지만 그럼에도 고민들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늘 새롭게 떠오른다. 고민에도 중독성이 있는 것일까.


빵떡은 이 고민들을 주제로 글도 몇 번 썼다. 하지만 잊어버리고 또 같은 주제로 글을 쓰곤 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망각은 왜 생기는 것일까. 빵떡은 '행동이 따를 수 없는 고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살이 찐 사람이 '살을 빼야겠어'라는 고민을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더 이상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빼야겠어'라고 고민한 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살을 빼야하는데...'라는 고민을 매번 새롭고 가슴 아프게 할 것이다. 빵떡이 하는 고민, 예컨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은 해결책이 없다.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할 만한 행동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롭게 고민스럽다.


빵떡의 첫 번째 고민은 특히 대비할 수 없고, 그저 '당해야'하는 것이다. 곧 집이 방화될 것을 알면서도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꼴이다. 누군가는 다른 일에 집중하며 방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고, 방화된 후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겸허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방화는 반드시 일어나고, 이를 피하거나 그 후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빵떡은 첫 번째 고민을 되도록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막막하고, 막막하다는 것은 누워있던 매트리스 속으로 푹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분이 들면 빵떡은 벌떡 몸을 일으켜 한참 운다.


두 번째 고민 역시 현명한 사람이라면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큰 고난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사람들은 가짜 세계에 사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세계, 유비무환의 세계, 공명정대의 세계. 그래서 준비하면 고난을 피하고, 착하면 벌 받지 않고, 한 만큼 되돌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피하고 싶은 고난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고난은 사고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달려오는 자동차에 대비할 수는 없다. 터지는 용암에도 대비할 수 없고 칼을 들고 뛰어 오는 살인마에도 대비할 수 없다. 빵떡은 아주 코앞에 작은 일에만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 후 있을 회의나 다음주에 있을 모임 같은 것.


세 번째 고민은 조금 복잡하다. 우선 빵떡은 정체성을 가져야 하냐 아니냐에서부터 확신이 없다. 이 고민을 시작하면 '모두 죽을 마당에', '우주의 먼지 주제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하는 생각들이 화다닥 달려든다. 그럼 빵떡은 맥없이 '정체성.. 굳이 가질 필요 없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났다면 이 고민은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체성은 인생에서 취사선택할 수 없는 요소다. 이런 것이다. 내가 '똥을 굳이 왜 싸?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상관 없이 인간은 반드시 똥을 싸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정체성도 그런 것이다. 필요 있고 없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을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귀하고, 소수만 갖는 것.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은 자동으로 정체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인간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한다고 한다. 내편 네편 가른다는 건데, 이러는 이유는 그게 스스로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내집단이라고 생각한 집단의 성질을 스스로에게도 어느 정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 중 하나다.


그러니까 정체성은 다이아몬드라기보다 생리현상 같은 것이다. 모두 자연스럽게 그걸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갖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고, 이제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마음에 드는 정체성을 가질 자격이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전자인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는 중요하다. 누군가 골라주는 정체성을 갖고 살다 보면 시간이 흐를 수록 어딘가 불편하고 부족한 느낌이 든다. 흔히들 말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이란 표현이 딱 맞다. 마음에 드는 정체성을 찾으면 누가 소리내어 '너 그런 사람이구나!'라고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뿌듯하고 맞는 길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에 드는 정체성을 찾았다면, 이제 '00한 사람'이라는 티겟을 얻기 위한 여정에 들어선다. 우리의 업무 활동, 취미 활동, 소비 활동, 창작 활동 등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드는 정체성을 가질 자격을 얻기 위해서다. 이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길을 잃기도 하고, 원하는 정체성과 실제 내 모습에 괴리를 느끼기도 하고, 모순된 내 모습을 통합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기도 하고, 애초에 잘못된 정체성을 마음에 담았다면 여정을 진행할수록 더 허하고 아파지기도 한다. 길을 잘 찾아가는 듯 보이는 사람도 어느 수준에서 만족할지 몰라 죽을 때까지 어딘가에 도착하지 못하기도 한다.


빵떡은 전자와 후자의 고민을 번갈아가며 한다. 그리고 자주, 사는 데 이런 게 대체 왜 필요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을 떠올린다. 그러느라 빵떡은 항상 제자리에 있는 기분이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하염없이 다짐만 하듯, 빵떡도 제대로 살기가 싫어 하염없이 고민만 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많은 책에서 '인간이 이러저러하는 이유는 진화 때문입니다'하고 진화론으로 귀결시키던데. 생존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이 '답 없는 고민 중독증'은 어떤 진화의 결과일까. 혹시 인간은 '너무' 생존해버린 게 아닐까. 우리의 생존력은 이제 필요한 정도를 넘어 잉여가 되어서 이 잉여를 소진하기 위해 쓸데 없는 고민들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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