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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ug 06. 2021

바디로션을 바르다가

올해 생일에 복숭아 향 바디로션을 선물 받았다. 먹으면 새콤달콤 복숭아 맛이 날 것처럼 향이 좋다. 나는 바디로션을 자주 바르지는 않는다. 요즘 같이 더울 땐 목욕을 끝내고 뜨거운 습기 속에 바디로션을 바르고 있다 보면 곧 땀이 나기 시작하고, 그럼 내가 몸에 문지르는 것이 로션인지 땀인지 모르게 된다.


하지만 오늘처럼 집에 혼자인 날엔 목욕을 마치고 몸에서 뜨거운 김을 뿜으며 알몸으로 거실에 나온다. 거실엔 에어컨을 틀어놔서 몸이 금방 보송해진다. 바디로션을 죽 짜서 몸의 구석구석에 바른다. 일부러 천천히 꼼꼼히 바른다. 복숭아 향이 나고 뭔가 사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어쩌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몸을 부들부들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향기까지 나게 하게 되었을까.


나이가 들면 소위 '자동화'되는 일이 많아진다. '이걸 이렇게 해야지, 그 다음 동작은 저렇게 하고'라고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하는 일들 말이다. 덕분에 뇌는 큰 품을 들이지 않고도 세수를 하거나 숟가락질을 하거나 익숙한 길을 걷거나 음식을 씹는 일들을 할 수 있다. 바디로션 바르기도 그런 일 중 하나다. 손이 알아서 익숙한 순서에 따라 팔 팔꿈치 어깨 목 승모근을 문지른다. 뇌는 그동안 다른 생각에 몰두한다.


'오늘 회사에서 그 일은 진짜 바보 같았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뭐... 다들 자기 살기 바빠서 내 실수는 금방 잊어버렸을 거야' 요즘 내 머리는 일을 하지 않을 땐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한다. '00 님이 낸 의견 참 좋던데,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아냐 누가 내는 게 뭐가 중요해. 일만 잘 굴러가면 되지' 종아리에 로션을 바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다른 팀은 다들 성과가 잘 나왔는데 우리 팀만 안 나왔어' '열심히는 했지만... 열심히만 했기 때문 아닐까. 잘 했어야 하는데' '우리 팀엔 인력도 부족했고... 나도 팀장된 지 얼마 안 됐잖아. 성과가 안 좋을 수 있지' '그래도 내가 헤매지 않았다면, 좋은 결정을 빠르게 했다면 어땠을까' '다른 팀들을 진심으로 축하하지도 못했어' '팀원들이 내게 불만이 많을 거야.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온 몸에서 복숭아 향이 났다. 나는 더없이 차분한 몸짓으로 옷을 주워 입었다. 이윽고 '퇴사해버릴까..'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난 아직 회사를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저 사람들이 "너 정말 힘들었구나!"라며 어르고 "어떻게 해줄까"라고 달래고 "너 정말 잘하고 있어, 회사에 남아줘"라고 부탁하는 것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다. 자기연민으로는 부족하고 남들도 나를 연민해주면 좋겠다.


'자기애가 너무 강한 건 아닐까. 칭찬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지' '스스로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뭘 좀만 못해도 주눅드는 거지' '그래 그런 건가봐. 스스로를 좀 덜 특별하게 생각하자. 아예 바보라고 생각해 버리자.'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쪽으로 나름 결론을 내린다.


내 뇌는 일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낄낄거리지 않는 시간엔 보통 이런 생각을 한다. 오늘은 결론을 내렸지만 내일은 또 같은 고민을 원점에서 다시 할 거다. 술주정뱅이가 된 기분이다. 매일 만회할 기회를 갖지만 결국 만회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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