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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Nov 24. 2021

2021년 11월 일기 모음

인간이 일기에 보이는 것만큼 나쁘지 않음

트위터식 일기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트위터식 일기 쓰기란 제가 붙인 이름인데요. 쓰고 싶은 날 400자 정도 쓰는 일기입니다. 짧게 꾸준히 쓰기 위해 택한 방법입니다. 10월 중순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은 한 달이었는데, 일기를 보니 세상 너무 우울해서 의아했습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니 기쁜 날엔 별로 글을 쓰고 싶지 않고 울분에 찬 날에만 '으으 족가튼 세상...'하면서 글을 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일기장 가장 앞에 '인간이 일기에 보이는 것만큼 나쁘지 않음'이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모든 일기는 '아버지,'라고 시작하는데요. 특별히 효녀라서는 아닙니다.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전도연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나옵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상적이어서 저도 그렇게 써봤습니다.


10/18

아버지, 제 인생을 행복하게 여기기 위해 남의 불행을 생각했습니다. 한결 행복해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밖에 행복할 수 없는 삶일까요.


10/19

아버지, <생의 한 가운데>는 제겐 성경 같은 것입니다. '불행해도 괜찮아요'가 아니라 '내가 그 불행을 원합니다'라는 메시지는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기꺼이 불행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왜 이토록 인상적일까요. 저는 그런 사람을 동경합니다.


10/20

아버지,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섬찟한 비밀은 언제까지나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일 겁니다. 혹은 이렇게 글로밖에 쓸 수 없는 것입니다.


10/21

아버지, 오늘 네일을 받으러 갔습니다. 네일을 해주신 분께서 "네일 처음 받는 분치고 손에 힘을 잘 풀고 계시네요."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칭찬이라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10/22

아버지, 드라마 <인간실격>을 보았습니다. 저는 상상 속에 저를 등장시킬 때면 어리고 도덕적 결함이 없고 유머와 여유가 있고 무언가로 크게 인정받는 사람으로 상정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의 근사치도 가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원하는 모습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들이 모두 내것이 아니게 되면 저는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요. 마흔이 좀 넘어서도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럼 어떡하지...'하며 불쑥 무서워졌습니다.


10/23

아버지, 스무살 때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여전히 마음에서 뭔가 퍼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들은 아주 어릴 때 모두 결정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10/24

아버지, 아주 대단한 뭔가를 이루고 싶다가도, 또 아주 아무것도 아니고 싶어지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10/25

아버지, 저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좋아합니다. <매드맥스>를 본 이후 쭉 그랬습니다. 사막을 배경으로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분투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을 목표로 싸우는 것이 제겐 인상적입니다.


10/26

아버지, 어떤 날은 저들 사이에 속하고 싶다가도 어떤 날은 저들 사이에 절대 낄 수 없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10/28

아버지, 요즘 성격이 나빠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앞에 걸어가는 사람에게 '족가트니까 알짱거리지마'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10/30

아버지, 저는 솔직함에 큰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어차피 어느 수준 이상으로는, 그러니까 완전히 솔직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핵심적인 것은 혼자만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10/31

아버지, <소유냐 존재냐>를 읽었습니다. 좋았던 구절을 옮겨 적어봅니다.

'존재적 인간은 자신을 망각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자신의 지위를 잊어버린다. 그의 자아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연유로 인해서, 상대방과 상대의 생각에 맞서서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세울 수 있다. 그는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생각들을 탄생시킨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루시 폴이 유퀴즈에 나온 걸 보고 존재적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딴 학위나 쌓아온 지식을 '소유'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아까워서' 가수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순간순간 하고 싶은 일을 했고 그 순간 존재하기에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내가 소유한 것들이 떠오른다면 거기에 지배되고 발목을 잡히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루시드 폴이 '나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마저 너무나 존재론적이었습니다.


11/1

아버지, 좋은 사람이 아닌데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니 어렵습니다. 오늘은 힘든 날이었습니다. 낮에 한 번, 밤에 한 번 울었습니다. 많이 운 건 아니고 조금씩 울었으니 많이 힘든 건 아니겠지요.


11/3

아버지, 오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고 싶은 날입니다. 아무도 절 기억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삶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서울까요. 동시에 얼마나 자유롭고 짜릿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상황이든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11/6

아버지, 모든 것을 조금씩 가볍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종종 너무 무겁게 생각해 일을 망치곤 합니다. 너무 무거워서 고통스러워하고 지나치게 고민하다가 좋지 않은 결론을 내리고 도망칩니다.


11/7

아버지, 모두 저를 바보 취급 하더라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11/8

아버지, 저는 완벽한 것보다는 어딘가 어그러진 데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컨대, 색이 벗겨진 것을 가리려 매니큐어를 칠했다가 오히려 더 이상해진 보석함 같은 것 말입니다. 어그러진 것은 어그러진 이유가 제각각 있습니다. 그 어설프고 우스운 이유들이 저를 구성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완벽한 것을 사용할 때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어그러진 것을 사용할 때는 조금씩 신경을 써야 합니다. 힘주어 열지 않으면 잘 열리지 않는 녹슨 수납장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관심을 떼어주며 정이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일부러 망가뜨리진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11/11

아버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며 '올 겨울은 작년보다 더 힘드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올 겨울에 작년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고 3시간 늦게 퇴근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오늘 아침엔 몇 분 더 자려고 버티다 조금 늦게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가망 없이 늦게 일어난 건 아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하면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할 만한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유롭게 해내지도 못하고 대차게 말아먹지도 않는, 애매한, 그래서 늘 버둥거리는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애썼음에도 결국엔 조금 늦고 마는, 그런 날들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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