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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Dec 09. 2021

2021년 11월과 12월 사이 일기 모음

수건과 손톱과 보풀만을 생각하며 한 때를 보내고 싶습니다.

11/19

아버지, 저는 요즘 우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운다기보다 눈물이 잘금잘금 나온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쁘게 또르륵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실금에라도 걸린 듯 추잡하게 눈물을 흘립니다. 애매하게 슬프거나 애매하게 감동적이면 이렇게 웁니다.


11/21

아버지, 삶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던지, 아니면 손 털고 떠나던지.


11/22

아버지, 재능도 노력도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소속되었다고 생각한 곳에서 점점 환대받지 못할 때,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요. 언제 물러나야 비겁한 도망자가 아니라 한계를 인정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는 걸까요. 물러날 때도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11/23

아버지, 오늘 달이 둥그렇고 선명했습니다. 소원을 빌려고 했는데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더 바랄 게 없는 날이어서 그랬을까요. 아버지, 오늘은 소원이 없는 날입니다.


11/25

아버지, 저는 아주 오만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조금만 뭔가를 잘해도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럽고, 조금 틀리면 '조금밖에 틀리지 않았다니.. 홀딱 망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11/25

아버지, 모든 부분에서 조금씩 망쳐버린 것 같을 때는 마음 속으로 리셋 버튼을 누르려고 합니다. 어릴 때 흰 선만 밟다가 실수로 흰 선 바깥을 밟았을 때 '아니야 사실 여기부터 진짜 시작이야'라고 되뇌인 것처럼 지나간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고 여기부터 다시 잘해보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려 합니다.


12/1

아버지, 오늘 패딩을 꺼내 입었습니다. 이 패딩은 처음 받은 날엔 태권도 도복 같은 소매 재질 때문에 싫어하다가 지금은 얇고 편안해 잘 입고 있습니다. 싫었던 것이 좋아지고 나쁘다고 생각한 일이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고 좋았던 것이 조금 부담이 되는, 그런 일이 만연하는 요즘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래서 인생사가 세옹지마이니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했나봅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일희일비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강하고 용감한 사람일까도 생각합니다. 저는 '희'했다가도 '비'할 것이 무서워 '희'한 순간에도 충분히 기뻐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일희일비할 수 있는 용기와 에너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와 '비' 사이에서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힘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12/7

아버지, 저는 수건을 개는 일, 손톱을 깍는 일, 옷의 보풀을 제거하는 일, 선풍기를 잘 닦아 덮개를 씌우는 일, 속옷이 든 서랍을 정리하는 일. 그런 일들을 좋아합니다. 이 일들은 제가 바쁘면 가장 먼저 미루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이 일들을 한다는 건 제게 여유가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이 일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일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눈 앞의 수건과 손톱과 보풀에 집중하게 됩니다. 수건과 손톱과 보풀만을 생각하며 한 때를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사치스러운 일일까요.


12/8

아버지, 내일 할머니가 백내장 수술을 하신다고 해서 저녁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할머니가 어디냐고 해서 회사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언제 퇴근하냐고 해서 한두 시간은 더 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너무하네~ 아이고 너무하네~ 한 사람 더 쓰라 해라~"고 했습니다. 할머니의 너무하네는 어머니, 아버지와 통화할 때도 배경음악처럼 오래 이어졌습니다. 그게 웃기다가 슬프다가 웃겼습니다. 결국 수술 잘 받으시라는 말을 하는 것은 까먹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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