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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an 09. 2022

2021년 12월 일기 모음

12/10

아버지, 저는 언제나 굳건한 사람이기보다, 종종 약해지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회복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런 스스로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자책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레 다시 굳건해지길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갖고 싶습니다.

<크래프톤 웨이>에 누군가 밑줄쳐 놓은 문장을 옮겨 적습니다.

'소통 과정에서 경영자는 인간적 상처도 많이 받을 것이다. 나의 이기심은 자연스럽지만 타인의 이기심은 나에게는 자연스럽지 않다. 어쩌면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점점 식어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버려서는 안 된다. 경영은 본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사실상 멋진 경영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12/11

아버지, 오랜만에 혼자 맞는 아침이었습니다. 바삐 나갈 곳이 없고 곁에 아무도 없는 아침은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런 아침은 마음을 졸이게 합니다. 어딘가 동떨어진 곳에서 깨어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과도 상관 없는 사람이 된 느낌입니다. 오줌이 마렵습니다. 화장실에 가야겠습니다.


12/13

아버지, 저는 정말 괜찮지 않을 때는 괜찮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제가 괜찮지 않다는 걸 몰라야 조금이라도 괜찮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무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무서운 일입니다.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러 개의 올가미에 걸리는 기분입니다.

왜 그런 거 아시죠, 저를 좋아해서, 안쓰럽게 여겨서 저를 변호해주는데 그게 더 비참한 거요. 그럴 땐 입술을 꽉 깨물어서 입술이 붓습니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입니다.

효석이는 어이 없는 요구를 하는 고객사에 화가 난다고 합니다. 광종은 엉망이 된 상황에 화가 난다고 합니다. 저는 늘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자의식이 너무 강한 걸까요. 스스로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걸까요. 바보 같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은 힘듭니다.


12/17

아버지, 저는 언제나 돌아갈 곳을 찾습니다. 그곳은 제 정체성이 될 수도 있고, 긴밀한 인간 관계가 될 수도 있고, 태도나 마음가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확실한 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곳이라는 겁니다.

아버지, 저는 많은 것을 선망합니다. 그것을 잡기 위해 빈번히 헤맵니다. 작게나마 성취도 하고 크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 사이사이 뒤를 돌아봅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을까. 그곳은 언제까지나 온전히 있는가.


12/19

아버지, 어제는 눈이 왔습니다. 너무 예쁘게 와서 살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눈 쌓인 길을 산책했습니다. 산책에 관해 어디선가 읽은 구절을 옮겨 적습니다.

'산책이란 니체에게 현실적인 구원이었다. 그 구원은 도시와 사람들, 번잡한 세상사에서 물리적으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연에 파묻혀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드는 일이었다.'


12/22

아버지, 우리가 좋은 것을 자꾸 읽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자꾸 까먹기 때문입니다.


12/24

아버지, 스파이더맨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스파이더맨을 기억하지 못하는 엔딩이었습니다.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사람들을 돕는, 그러니까 쎄가 빠지게 두 탕 뛰는 삶을 삽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외롭습니다. 히어로는 멋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어로는 외롭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지키는 그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지만 큰 힘 같은 거 좆도 원해본 적 없다면 어떨까요. 영현이는 제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습니다. "스파이더맨의 고단함에 대해 생각해." "왜 요즘 부쩍 고단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거야?" 제가 그랬나요.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의 고단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편하게 되지 않고 부득부득 애써야 해낼 수 있는 고단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걸 무슨 힘으로 지속해 나가야 할까'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단함을 지속해나가는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싶었나봅니다.


12/25

아버지, 저는 종종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삶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 중간중간 짧은 휴식이 있을 뿐입니다. 삶과 싸움은 동의어는 아니지만 싸움 없는 삶은 없습니다. 누구나 나름의 싸움을 하며 삽니다. 어른이 되면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점은 '해결'에 있지 않습니다. 해결이 되든 그렇지 않든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 문제와 싸움에 몰두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과 싸움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했지만 삶과 문제는 동의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없고 문제가 있는 곳에서 진짜 삶이 시작됩니다.


12/27

아버지, 그런 기분을 아시나요.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도 걱정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기분. 실제로 기대도 걱정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지하실에 넣어 두는 겁니다. 느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래에 눌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차례를 기다리는, 감당 안 되는 문제들을 못 본 척합니다.


12/29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

"효정이 무해해서 그래요. 유해한 사람 앞에선 긴장이 되지. 일은 좀 어때요?"

"글쎄요, 별 생각 안 하려고요."

"재미은 있어요?"

"네."

"효정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네요."

아버지, 저는 이상하게 조금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12/31

아버지, 2021년의 마지막 일기입니다. 저는 도망치고 싶을 때 한 가지 상상을 합니다. 갑자기 국정원에서 회사로 쳐들어와 "사실 저 녀석은 국정원 소속 해커입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죠. 북한과의 사이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합니다." "아, 돌아갈 때가 되었군요. 여러분 죄송해요. 전 아쉽게도 회사에 더 다닐 수가 없어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는데... 세상이 절 필요로 하는군요. 일이 끝나면 신분을 숨기고 다른 이름으로 먼 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상상입니다. 상상에 몰입하다 깨어나면 꽤 씁쓸합니다. 국정원도 없고 해커도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칠 구멍은 없습니다. 눈 앞에 있는 일을 해내지 못하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요즘 헛디디면 떨어진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의연해지려고 합니다. 문제를 풀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겪는 성장통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겪는 성장통에는 유난히 연민을 느끼는 건 좋은 꼴이 아니겠죠. 저는 부족한 게 당연합니다. 못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 하겠죠. 모르는 것, 그래서 비난 받는 것,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 그래서 도끼로 스스로의 머리를 내려 찍고 싶은 것, 수치심을 느끼는 것,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것,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나면 저는 정말 달라져 있지 않을까요. 정말 큰 문제를 푸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조직이, 동료가, 지인들이 제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그들 속에 숨어 있는 선의를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잘해보자, 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2

아버지, 모든 것이 거꾸로 가는 기분입니다. 방법을 배우고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가 먼저 오고 허둥지둥 터진 곳을 어떻게든 꼬맨 후에야 '아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구나'라고 약간 감이라도 잡는 식인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인생은 언제나 그런 식이라는 걸 깨닫고, 그런 상황에서도 지치지 않고 해결해나가는 태도를 갖는 거라 생각합니다.


1/3

아버지, 저의 최대 쟁점은 늘 '역량'이었습니다. 역량이 안 되는 사람이나 '태도'를 운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역량은 사실 허상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건 태도뿐이라는 걸요.


1/4

아버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든 그렇게까지 기쁠 필요도, 그렇게까지 힘들어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은 어디까지나 일이니까요.


1/5

아버지, 마음이 오락가락합니다. 혹은 변함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니까요. 회사는 동아리가 아니니 '쓸모'가 중요합니다. 제가 쓸모 없는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회사는 지옥이 됩니다. 주눅이 들고 사람들이 날 좋아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해, 남들은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하려 해도 소용 없습니다.

유일한 해결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쓸모 없는 시절을 버티고 나와 남이 인정할 만한 쓸모를 갖는 것입니다. 물론 버틴다고 모두에게 쓸모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야 할까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방법인 것 같은데,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세상에서 쓸모 있는 게 제일 싫습니다.


1/6

- 네 꿈을 상상했을 때 겁나지 않으면 꿈이 너무 작은 거다.

- 너 자신을 믿어라. 나도 뒤돌아 보면 남들보다 훨씬 잘했는데도 불안해서 쓸데없이 스트레스 받았다.

- 미친 듯이 힘들 때가 성장하는 시기. 일상이 평온하면 성장이 멈춘 것.

저는 이런 야망독려 문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장보다 일상이 평온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 하지만 이런 때는 이런 문장에라도 기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겁나고 힘든 건 확실한데, 이게 나쁜 시그널은 아니구나, 좋아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1/7

아버지, 사람들은 본인이 좋다고 생각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라고 하면서 별로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명분을 물어댑니다. 개빡칩니다. 그러나 사실 저도 똑같기 때문에 어디다 화내진 못합니다.


1/8

아버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좋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되면 잘 살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보통 아무 것도 안 하니까요.

아버지, 이제껏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키우는 식물이기보다 칼이나 도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벼리고 쓸모에 맞게 사용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돌보지 않으면 무엇도 지속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유튜브에서 소금과 우원재가 나오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음악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망가지면 제대로 된 음악도 나올 수 없다는 얘기. 저는 일을 뭐라고 생각한 걸까요. 삶을 깎아서 일을 더 잘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아버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정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제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노력은 노력대로 하면서 문제는 풀리지 않게 됩니다. 지금 저의 문제는 지속가능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와 삶과 일과 인정을 적절히 정의하고 분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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