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실굽실굽실
친구랑 술을 먹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커플이 앉았다. 앉으면서부터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 잘들 보시라고 씩씩거리면서 싸운 티를 냈다. 남자가 마른 먹태처럼 찌글찌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까 뭘 잘못한 것 같았다. 여자는 열과 성을 다해 남자한테 뭐라뭐라 했다. 친구도 슥 돌아보더니 커플의 에널제릭한 모습에 "청춘일세 껄껄"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고 한참 송송커플 결혼 소식에 호에에 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오더니 "저기 왜 자꾸 쳐다보시는 거에요?" 했다.
나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사고도 미리미리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대쫄보인데 여자가 그리 나오니까 반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에 저 그게 아니고" 하면서 스미마셍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여자는 좀 듣더니 "아 그래요?"하고 다 알고 있는데 심심해서 와봤어 라는 느낌으로 대답하고 돌아갔다. 나는 친구 앞에서 별 일 아닌 거에 한껏 쫀 게 민망해서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마시면서 생각해 보니 눈이 달려서 전방을 주시했을 뿐인데 왜 시비를 털린 건지 억울해졌다. 그래서 머리 속으로 여자에게 당당히 맞서는 나를 상상했다. "왜 쳐다봐요?" "제가요? 앞에 앉아 계시니까 봤나보죠" "우리 싸우는 거 봤잖아요" "아 싸우셨어요? 여기서 화풀이하시는 거에요?" 아 이렇게 말할껄... 그럴껄...
하지만 나는 화나면 목소리가 떨리고 발음이 웅엥웅엥거리고 얼굴이 빨게지고 눈물이 그렁한 스타일이라서 절대 상상대로 안 된다. 나는 이 병신 같은 신경계와 호르몬 작용을 어릴 때부터 저주해 왔지만 저주한다고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대신 나는 화가 난다는 신호가 오면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웃는다는 것은 곧 비웃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한 방 맥일 수도 있는 굿쟙 스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잘못 섞여서 웃으면서 떨고 웅엥거리고 빨게지고 그렁하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 스킬도 쓰지 못하고 그냥 굽실거리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