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깔짝깔짝

굽실거리는 이유

굽실굽실굽실

by 빵떡씨

친구랑 술을 먹는데 맞은편 테이블에 커플이 앉았다. 앉으면서부터 술집 안에 있는 사람들 잘들 보시라고 씩씩거리면서 싸운 티를 냈다. 남자가 마른 먹태처럼 찌글찌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까 뭘 잘못한 것 같았다. 여자는 열과 성을 다해 남자한테 뭐라뭐라 했다. 친구도 슥 돌아보더니 커플의 에널제릭한 모습에 "청춘일세 껄껄"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고 한참 송송커플 결혼 소식에 호에에 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오더니 "저기 왜 자꾸 쳐다보시는 거에요?" 했다.

나는 일어나지 않은 사건사고도 미리미리 걱정하고 초조해하는 대쫄보인데 여자가 그리 나오니까 반사적으로 변명을 했다. "에 저 그게 아니고" 하면서 스미마셍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여자는 좀 듣더니 "아 그래요?"하고 다 알고 있는데 심심해서 와봤어 라는 느낌으로 대답하고 돌아갔다. 나는 친구 앞에서 별 일 아닌 거에 한껏 쫀 게 민망해서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마시면서 생각해 보니 눈이 달려서 전방을 주시했을 뿐인데 왜 시비를 털린 건지 억울해졌다. 그래서 머리 속으로 여자에게 당당히 맞서는 나를 상상했다. "왜 쳐다봐요?" "제가요? 앞에 앉아 계시니까 봤나보죠" "우리 싸우는 거 봤잖아요" "아 싸우셨어요? 여기서 화풀이하시는 거에요?" 아 이렇게 말할껄... 그럴껄...

하지만 나는 화나면 목소리가 떨리고 발음이 웅엥웅엥거리고 얼굴이 빨게지고 눈물이 그렁한 스타일이라서 절대 상상대로 안 된다. 나는 이 병신 같은 신경계와 호르몬 작용을 어릴 때부터 저주해 왔지만 저주한다고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다. 대신 나는 화가 난다는 신호가 오면 웃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웃는다는 것은 곧 비웃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한 방 맥일 수도 있는 굿쟙 스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잘못 섞여서 웃으면서 떨고 웅엥거리고 빨게지고 그렁하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 스킬도 쓰지 못하고 그냥 굽실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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