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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Jun 01. 2022

2022년 5월 일기 모음

5/9

문득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가사가 진짜 어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사랑은 연필로 쓰↗︎으세요'

사랑도 틀릴 수 있다는 전제가 마음에 들었다. 연필과 잉크의 비유도 적절했다. 무엇보다 경쾌한 멜로디로 불러서 좋았다.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와 "사랑? 틀렸으면 지워버려!" 하고 다시 엉덩이를 흔들며 홀연히 사라지는 쾌남의 뒷모습 같은 노래.


5/16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는 사람과 안 받는 사람. 나는 받는 사람이다. 주말에 한강에 가면 전단지로 캠프파이어도 할 수 있을 수준으로 수북히 받는다. 내가 전단지를 양손에 구겨 쥔 채 쓰레기통을 찾아 헤매고 있으면 안 받는 유형의 인간은 "그걸 왜 다 받아?"라고 묻는다.


전단지를 받는 이유는 그 순간을 모면하지 못해서다. 나를 향해 뻗는 손, 받아달라는 눈빛, 한참은 더 나눠줘야 끝날 것 같은 남은 전단지의 양. 그 몇 초를 면하지 못해 전단지를 받아든다. 생각해보면 나의 삶은 면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해온 일들의 연속이었던 것도 같다. 누군가의 기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상황, 외면하지 못하는 나. 상황에 휩쓸려 시작해서 관성으로 지속하고 도망치듯 끝내는 패턴의 반복.


이 패턴을 반복하다보면 나의 욕망은 차순위가 된다. 오랫동안 귀 기울이지 않아서 욕망은 냉동실에 방치된 사골육수처럼 꽁꽁 언다. 더이상 생명의 신호가 잡히지 않는 냉동의 무언가가 된다. 이것을 해동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5/17

이번에 퇴사하면서, 지금까지 성장해온 방식으로는 더 성장할 수 없는 시기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도 매일 같은 운동을 해서는 근육을 더 단련할 수 없다. 그땐 다른 운동을 하고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한다.


나도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몸에 밴 것들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 혼자서 1인분의 몫을 해내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팀의 몫을 해내는 것은 어려웠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내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혼자 먼저 겁을 먹고 물러났다.


ios 운영체제처럼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내 보상회로, 내가 기쁨을 느끼는 상황이 설정돼있어서 바꿀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한 발 물러났다. 아직 '그렇지만 극복해냈답니다'까지 가지 못했다. 쓰다 만 성장 드라마처럼.


5/18

아주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 먹는 게 오히려 잘하는 걸 방해한다.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로 밀어 붙이다 보면 내 안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시그널을 듣지 못한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쉽다, 어렵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신난다, 힘들다, 몰입이 된다, 몰입이 안 된다... 이런 시그널이 사소하고 방해되는 감정으로 느껴진다. 그럼 내가 좋아서 신나게 몰입하는, 잘하는 일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진짜 잘 하고 싶으면 '그냥 대충 한 번 해봐야지' 정도의 마음을 갖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5/19

요즘 뭔가 결정할 일이 있으면

  '잠깐... 잠깐만.. 흠... 가슴이 뛰지 않는데? 안 해야겠어.' 혹은 '음... 성공의 냄새가 안 나는데? 성공은 후각이란 말이지' 같은 식으로 할지 말지 정한다. 내겐 일종의 놀이처럼 되었다.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합리적인 이유와 ROI와 논리를 고심하던 것이 신물 나서 당분간 모든 결정을 이렇게 할 생각이다.


5/20

퇴사하면서 그동안 나와 일했던 인턴들에게 연락을 했다.

  '나 퇴사하니까 5월 중에 회사로 놀러와라. 거지되기 전에 밥 한 번 사겠다.'

그래서 어제 내 첫 인턴을 만났다. 이 친구는 굉장한 야망캐다. 나중에 사업을 해서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왜 성공하고 싶어?"

  "돈을 엄청 많이 벌고 싶어요."

  "돈 벌어서 뭐하게?"

  "아 효정, 그건 진짜 돈의 속성을 모르고 하시는 질문이에요. 돈은요, 어디 쓰려고 버는 게 아니에요. 돈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요. 그 돈으로 내가 살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의 가능성을 갖는 거죠. 그만큼 좋은 게 어디있어요?"

나는 그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다. 아, 돈이란 그런 것이구나.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동시에 이 녀석은 나랑 본질부터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이 친구가 성공하면 내가 오늘 술 사준 걸 잊지 않으면 좋겠다.


5/21

내가 사랑하는 인간 부류가 있다. 루시드 폴, 이장원, 신재평, 손석구, 릴러말즈... 이들의 인생사는 현대지식의 결정체 나무위키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에 뭘 했든, 다음 스텝을 정할 때 마치 백지 상태인 것처럼 앞으로 뭘 해야 행복할지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이제까지 해온 것에 기반해 다음 스텝을 정한다. 그게 승산이 있으니까. 좀 더 유리한 입지를 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방향으로만 생각하면 내가 진짜로 행복해지는 방향으로는 생각할 줄 모르게 돼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70세까지 일한다고 해보자. 지금 30세면 40년을 더 일해야 한다. 산 것보다 더 긴 노동의 세월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4~5년에 걸쳐 쌓은 커리어는 한 줌이다. 이 한 줌에 매달려 미래를 결정할 필요는 없다. 백지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정신차리고 지금 하는 일 잘해서 어떻게든 다음 커리어의 디딤돌로 삼자'고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정신을 차린 순간일지 모른다.


5/22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1차원적인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슬쩍 보면 악하다. 남을 깎아내리고 견제하고 깔아뭉개서 본인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괴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게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미성숙하고 약한 인격을 악한 행동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다. 내게 문제가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도 약점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강하고, 인내심은 없지만 원하는 걸 이루고자 하는 투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어떤 부분에선 그를 존경한다. 그래서 그를 돕고 싶다. 그가 내게 기대하는 걸 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가 기대한 것들은 내겐 무리한 일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애쓰는 과정에서 늘 나의 부족함을 대면했다. 점점 내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건 어떤 것보다 내게 큰 타격이었다.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위축되고 위축되면 부족한 모습이 더 부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견딜 수 없었다.


5/23

영화 예고편 아니면 뮤직비디오 같은 삶을 살고 싶었나보다. 채 3분을 넘지 않는, 하이라이트만 압축해 놓은 삶. 하지만 실제로는 그 3분을 80년으로 늘여 사느라 이렇게 NG도 많고 비하인드도 많은 삶이 돼버렸다.


5/24

퇴사를 실감했을 때는 매니저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아니고, 타운홀 미팅에서 울면서 인사했을 때도 아니었다. 퇴사 서류를 작성할 때 비로소 '내가 영영 이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구나.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차가운 종이 위 더없이 사무적인 활자를 보고 나서야 현실을 깨닫는 걸 보니 완벽한 현대서류형 인간이 다 되었나보다.


5/25

회사 인재상 중 가장 우선순위 높은 항목이 '메타인지'다. 너 자신을 알라. 스스로의 강점, 약점 그리고 내적 동기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돼있다. 나는 '내적 동기'보다 '욕망'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삶에 뭘 원하는지, 뭘 욕망하는지, 뭐에 들끓는지. 그걸 아는 게 일에 있어서도, 행복해지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그걸 표현하기에 내적 동기라는 말은 너무 점잖다.


5/26

<비앰비셔스>를 보기 시작했다. 스우파 볼 때도 그랬지만, 춤은 나와 아주 먼, 세상의 맞은 편에 있는 어떤 것이다.


<비앰비셔스>에서 프리스타일 배틀을 해야 하는데 한 댄서가 시작 전에 '자신이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몸이 움직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은 내가 움직이는 거지 몸이 움직여주다니. 짧은 발표를 할 때도 대본을 준비해 수차례 읽고 연습하는 나로서는 대책 없는 말로 들렸다. 초고를 쓰고 퇴고에 퇴고에 퇴고를 하는 '글'이라는 포맷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사람들은 음악이 나오면 거기에 맞춰 자동으로 움직이는 본능 같은 것을, 자극에 반응하는 시스템 같은 것을, x를 넣으면 y가 나오는 함수 같은 것을 체화하는 연습을 하는 걸까. 나는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그들이 경이로웠다.


5/27

  "외할아버지가 전립선 암이시래. 당장 병원에 입원하신 건 아니고, 곧 입원해서 치료 받으실지 어떻게 할지 얘기해봐야 해. 주말에 엄마가 외가에 가볼 거야."

이토록 사무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엄마를 보고 내가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엄마 속상하겠네."

나 역시 남의 일 얘기하듯 유감을 표했다.

  "응... 좀 그렇네."

잠시 말이 없던 엄마는 곧 울먹거렸다. 나의 건조한 공감에도 마음이 동할 만큼 엄마는 힘든 것일까. 원래 딸은 엄마가 울면 따라서 눈물이 나는 법이기에 나와 엄마는 전화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울었다.


5/28

  "나 말이야... 살 찌니까 왜이렇게 뚱해보이냐."

  "말은 똑바로 하자. 뚱한 게 아니라 뚱뚱한 거야."

  "... 쒸발롬이..."

회사 다니는 동안 몸무게가 많이 불은 나는 효석을 따라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가 하기 싫어지면 '이걸 왜 해야 할까?'라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효석과 달리기를 하다가 500m 정도 뛰었을 때 쯤 나는 존나 헉헉거리며 질문했다.

  "우리.. 헉... 왜 뛰어야 하냐..? 헉헉..."

  "많이 살찐 사람에서 조금 살찐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

효석은 조금도 헉헉대지 않고 답했다. 너무 설득력 있어서 닥치고 3km를 뛰었다.


5/29

<나의 해방일지>가 끝났다. 마지막 화에서 해방클럽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태훈은 해방이 되었냐는 질문에 "나의 힘겨움의 원인을 짚었다는 거 외엔..."이라고 답한다. 이에 미정은 "그게 전부인 것 같아요. 내 문제점을 짚었다는 거."라고 말한다.


심리상담을 받아도 비슷하다. "효정 님이 힘든 원인은 이거네요. 이래서 괴롭네요." 까지는 잘 말해준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 그럼 전 이제 어쩌죠?"라고 물으면 "어쩌긴 뭘 어째요. 잘 아셨으니까 이대로 잘 사셔야죠."라고 답한다.


'이렇게만 하면 짜잔-! 전에 없던 새 사람이 됐어요!' 같은 건 없다. 누가 그렇게 해준다고 하면 사기다. 전에는 이유를 모르고 '좆같네...'라고 했다면, 이제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래서 좆같네...'라고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그게 대체 꽤나 한결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


5/31

마지막 출근을 했다. 의도치 않게 너무 뻑적지근하게 퇴사를 해서 왠지 뭔가 대단한 걸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분은 떨쳐버리기로 한다.


오늘 마지막 날이라 할 일이 없어서 봉은사에 두 시간 앉아 있다 왔다. 불멍 아니라 절멍이라는 말도 생기면 좋겠다. 절에 앉아 있으면 멍때리기 참 좋다. 바람이 불면 풍경 소리가 들리고, 연등이 서로 부딪히며 물 위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다닥 거린다. 스님이 중후하게 불경 외는 소리가 들리고 은은하게 향 냄새가 난다. 그런 반복적인 패턴 속에 있으면 멍이 절로 때려진다.


앉아서 '6월에 뭘 할까...' 생각했다. 만약 내가 6월이 끝나고 죽는다면 뭘 제일 하고 싶을까. 유럽 여행을 갈까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려볼까 책을 엄청 많이 읽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한 달 뒤에 죽는다고 해도 지금처럼 어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멍이나 때리다가 뒤지겠구나... 어쩔 수 없이 별로 하고픈 게 없는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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