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Jun 19. 2022

[단편] 놀이동산 나들이

긴장될 때만 배가 아픈 건 아니다. 설레는 일이 있을 때도 배꼽 근처가 저릿저릿하고 오줌이 마려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저녁부터 소파에 앉았다가 섰다가 부엌에 갔다가 거실에 갔다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다. 설렌다거나 기대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 내일 있을 좋은 일들이 도망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그런 감각이 전연 없는지, 내일 뭘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에 대해 계속 떠들었다. 그래, 오빠는 떠들어라. 나는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내일 예상치 못한 행운들을 활짝 맞이하리라.


우리 가족은 다음 날 새벽같이 출발했다. 어린이 날에 용인 들어가는 차는 필히 많을 것이고, 느적느적 출발했다간 도로에서 발이 묶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차 막히는 걸 가장 싫어했다. 나는 일찍 출발하는 게 좋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일찍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와 오빠보다 일찍 일어나 아이스 커피며 김밥, 과일을 싸고 있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묶었다. 아무리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모아도 한두 가닥씩 꼭 삐져나왔다. 머리를 다시 묶기도 하고 실삔을 꽂기도 했다. 팔이 아팠다. 뒷목에 땀도 났다. 결국 완벽히 마음에 들게 묶진 못했다. 신발장에 있는 거울 앞에 서서 마지막까지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머리를 확인했다. 엄마가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등을 밀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왔다.


엄마는 스타렉스 트렁크에 아이스박스를 실었다. 아빠는 뒷자리 의자 등받이를 완전히 젖혀서 우리가 누울 수 있게 만들었다. 집에서 이불을 갖고 내려와 의자 위에 덮으니 진짜 침대 같았다. 나와 오빠는 그 위로 기어올라갔다. 신나는 기분이 몸 곳곳으로 짜릿하게 퍼지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가자! 놀이동산 가자!"

차가 출발했다. 차가 가고 서고 함에 따라 우리 몸은 앞뒤로 조금씩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나와 오빠는 "워어~ 우워~"하는 소리를 냈다. 속이 좀 울렁거리는 것 같았지만 참을 만했다. 우리는 서로 이불을 갖겠다며 몸에 둘둘 말았다. 서로 발길질을 할 때마다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어허, 소민이, 민섭이 하지마"라고 주의를 줬다. 우리는 자동차 천장을 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보리쌀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진력이 날 때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오줌이 마려워 잠에서 깨니 놀이동산 주차장이었다. 나는 헉 하고 일어나 앉았다. 진짜 놀이동산이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놀이동산 개장 시간에 맞춰 왔는데도 주차장엔 이미 차가 가득했다. 아빠는 이미 주차장을 뺑뺑 돈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일찍 왔는데도 자리가 없단 말이야? 하이 참나..."

  "여보, 저기 자리 하나 난다."

  "저기 자리가 좁아서 차가 들어가겠나?"

  "그래도 다른 데 자리가 없어요."

  "아니 자리가 없어도 들어가야 말이지."

  "어 저 차가 들어간다."

  "하 저 새끼 저거... 내 차가 먼저 온 거 뻔히 알면서. 아 짜증나네..."

다들 참 부지런히도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더 일찍 왔어야 했나.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놀이동산 입구로 달려가고 싶었다. 어느새 일어난 오빠가 칭얼거렸다.

  "아 엄마, 우리도 빨리 들어가자."

  "주차를 해야 들어가지."

  "아 빨리 빨리~ 다른 사람들 다 들어가는데~"

나는 오빠의 보챔이 아빠를 화나게 할까봐 오빠를 꼬집었다.

  "아! 왜 꼬집어!"

  "가만히 좀 있어."

오빠는 억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으면서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 오빠가 답답해서 속이 터졌다. 오빠는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이유 없이 꼬집히기까지 해서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뭐, 어쩌라고?' 하는 입모양을 해보였다. 오빠는 주먹으로 내 팔뚝을 힘껏 쳤다. 나도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 왜 이래!"

  "둘 다 조용히 안 해! 주차할 데도 없는데 확 그냥 집에 가버린다. 어?"

아빠의 화난 목소리에 나와 오빠는 입을 다물었다. 눈깔만 죽일듯이 서로 부라렸다. 그렇게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주차장을 몇 바퀴 더 돈 끝에 겨우 이중주차를 했다. 우리는 서로 약간 서먹한 채 매표소에 갔다. 엄마는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코끼리 열차 표 금방 사올게~"

그런데 코끼리 열차를 기다리는 줄도 주차장의 자동차 행렬 만큼이나 길었다. 아빠는 뜨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휴 이거 오늘 안에 타겠어?"

  "코끼리 열차 타는 게 이 정도면 안에 들어가서 놀이기구는 몇 개 못 타겠는데?"

엄마, 아빠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보다 뒤에 온 사람들이 우리를 앞질러 가지 못하게 나와 오빠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 치며 코끼리 열차 앞에 줄을 섰다. 우리는 벌써 인파에 약간 질려버렸다. 아무 말 없이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 엄마, 아빠가 "이야 사람 진짜 많다" "그러게" 하는 말만 드문드문 주고받았다. 우리 앞뒤에 선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왁자하게 떠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괜히 그 사람들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놀이동산 처음 온 사람들처럼 구네'라고 생각하며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나는 이 뻔한 날 이 뻔한 곳에 온 사람들과 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도 신나지 않고 다 시큰둥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우리도 사진 찍을까?"라고 물어도 "됐어, 무슨 사진이야"라며 새침하게 거절했다. 오빠는 그저 지루한 듯 하늘로 손을 뻗고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오빠가 좀 점잖게 기다리길 바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는 코끼리 열차를 탔다. 막상 열차에 타니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노래가 흘러나왔고, 바람이 시원하게 볼을 스쳤다. 아까까지의 다툼이나 기다림은 없던 일로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순간을 오늘의 오프닝으로 삼기로 했다. 오늘 기분 나빴던 적은 없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는 활짝 웃었다. 엄마가 원한다면 사진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집에서부터 목에 걸고 온 비눗방울을 꺼냈다. 가만 들고만 있어도 바람이 알아서 비눗방울을 만들어냈다.


코끼리 열차는 식물원, 동물원을 지나 놀이동산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는 거의 1등으로 내려 암마, 아빠, 오빠가 내리길 기다렸다. 사람들이 거의 뛰듯이 놀이동산 입구로 향했다. 나도 빨리 가야할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엄마, 아빠 빨리! 오빠 빨리!"

오빠와 엄마가 내리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대체 왜 안 내리는 거야? 보아하니 오빠가 벗어놨던 신발을 다시 신고 있었다. 나는 속이 터졌다. 신발을 왜 벗고 있었던 거야? 벗고 있었으면 도착할 때쯤 신었어야지. 하지만 나는 이런 사소한 일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엄마와 오빠를 기다렸다. 아빠는 내 옆에서 "천천히 와, 천천히"라고 말했다. 곧 엄마와 오빠가 내렸다. 나는 놀이동산 입구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에서 엄마, 아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식간에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안쪽을 들여다보니 거대한 나무에 매달려 타는 그네와 동물 모양 자동차, 기념품 가게, 사진 찍는 사람들, LED 장미가 가득한 정원, 풍선을 파는 마차가 보였다. 하나하나 샅샅히 들여다보고 구석구석 놀아주리라.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는 입구에 선 언니에게 입장권을 내밀었다. 나는 언니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종이 팔찌를 채워주길 기다렸다. 언니는 종이 팔찌를 채워주는 대신 환하게 웃으며 네모난 종이에 구멍을 하나 뚫어주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원래 놀이동산에는 종이 팔찌를 차고 들어가는 건데. 아무튼 우리는 들어갔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엄마 왜 종이 팔찌 안 줘?"

  "종이 팔찌는 자유이용권 산 사람들이 받는 거고, 우리는 세 개만 탈 거라서 이 표를 받은 거야."

  "나 세 개만 타? 왜?"

  "어차피 사람이 많아서 세 개 정도 타면 더 못 타."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니까 이 많은 것 중에 세 개만 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말없이 걸었다. 아까까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등을 돌린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내게서 금지된 것 같았고 초대받지 못한 생일 파티에 온 것 같았다. 내 걸음은 등교할 때처럼 느려졌다. 나는 주위 아이들의 손목을 봤다. 모두 종이 팔찌를 차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아무것도 차지 않은 손목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소매를 끌어당겨 손목을 감췄다. 오빠는 자유이용권이 아닌 것이 별 상관이 없는지 그저 범퍼카를 타고 싶다고 방방 뛰었다. 엄마가 날 보며 물었다.

  "소민이도 오빠랑 범퍼카 탈래?"

  "아니, 절대!"

절대, 라고 말할 것까진 없었지만 무엇이라도 꼬투리를 잡아 화를 내고 싶었다.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티내고 싶었다. 세 개 밖에 못 타는데 그 중 하나를 멍청한 범퍼카에 쓸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엄마 손에 들린 놀이동산 지도를 홱 뺏어 들었다. 놀이기구는 너무너무 많았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뭘 타야 할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지도를 들여다 보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다람쥐통 놀이기구가 보였다. 다람쥐는 귀여우니까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엄마 나 다람쥐통 탈래."

  "오빠랑 범퍼카 타고 가자."

  "아 싫다고! 범퍼카 안 타, 다람쥐통 탈 거야."

엄마는 타겟을 바꿔서 오빠를 설득했다. 오빠는 좀 떼를 쓰는 것 같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오빠는 이거 하겠다 저거 사달라 요구사항은 많지만 고집이 세진 않았다. 반대로 나는 고집이 대단했다. 나는 허투루 뭘 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죽어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다람쥐통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른 모든 놀이기구들처럼 줄이 길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타러 왔는데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차라리 코끼리 열차를 탈 때가 더 기분이 좋았다. 놀이동산의 모든 것을 이용할 자유가 내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기분이 완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기다리는 동안 비눗방울을 불자고 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30분 정도 기다리니 내가 탈 차례가 되었다. 그래도 막상 놀이기구를 타려고 하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와 엄마, 나 곧 탄다!"

  "그래 이제 탄다. 엄마랑 아빠는 밖에서 보고 있을게."

  "알겠어!"

나와 오빠는 통 안에 들어가 마주보고 앉았다. 오빠는 신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평소라면 가만히 좀 있으라고 했겠지만 나도 기분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너그럽게 오빠에게 맞장구를 쳐줬다. 곧 기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간 통이 데굴데굴 굴렀다. 온 세상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심장 께가 간질간질했다. 내가 상상한 것처럼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았다. 다람쥐통은 방향을 바꿔가며 몇 분 정도 더 구르더니 천천히 멈췄다. 나는 안도했다. 오빠의 얼굴을 보니 오빠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얼굴이었다. 놀이기구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엄마, 아빠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재미있었어?"

나는 왠지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데굴데굴 구르는 걸 타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먼 길을 왔는데 재미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덟 살에도 그런 눈치는 있었다.

  "응 완전 재미있었어!"

나는 어쩐지 내 선택에 자신이 없어졌다.

  "엄마, 아까 오빠가 탄다고 했던 범퍼카 탈까?"

  "그럴래? 그래 착하네. 민섭아, 범퍼카 타러 가자."

엄마와 오빠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범퍼카로 가는 길을 찾았다. 나는 왠지 오늘 하루를 반쯤 포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완벽한 하루는 틀린 것 같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또 한참을 기다려서 범퍼카를 탔다. 범퍼카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나와 아빠가 같이 타고, 동생과 엄마가 같이 타서 서로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다람쥐통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한 번 더 타고 싶기까지 했다. 나와 오빠는 얼굴이 상기되어서 우리가 얼마나 세게 부딪혔으며 머리가 얼마나 띵했는지 등을 온몸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사람이 워낙 많아 점심 먹을 자리 찾기도 힘들었다. 겨우 한 쪽 구석에 앉을 수 있었다. 음식물이 좀 떨어져 있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빠는 반나절 내내 매고 다녔던 보냉박스를 열어 과일, 김밥, 유부초밥 같은 걸 꺼냈다. 나는 가까운 데서 파는 츄러스와 소세지에 눈이 갔다. 엄마는 나와 오빠에게 물었다.

  "다른 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엄마가 사줄게."

나는 오빠가 대답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없어."

나는 이런 곳에 오면 원래보다 가격이 비싸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걸으면서 "헤에 핫도그 하나에 3500원이나 해? 이야 놀이동산 물가가 쎄긴 쎄구나"라고 말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괜히 오빠가 이거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 하기 전에 딱 잘라 말했다. 내 예상대로 오빠는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표정을 살피더니 손을 잡고 가게 앞으로 데려갔다.

  "자 먹고 싶은 거 하나씩 말해. 안 그러면 엄마 마음대로 살 거야."

나는 주저주저했다. 하지만 엄마가 마음대로 사느니 내가 먹고 싶은 걸 말하는 게 나을 테니까. 나는 소세지를 골랐다. 오빠는 내가 고르는 걸 보고 기다렸다는 듯 알감자를 골랐다. 엄마는 거기에 환타 두 잔을 추가해 주문했다.

  "소민이, 민섭이가 먹고 싶은 거 말해줘서 엄마는 너무 좋아."

우리는 음식을 받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밥을 먹으며 마지막 놀이기구는 뭘 타야 할지 신중히 생각했다. 엄마는 놀이동산에 왔으면 후룸라이드를 타야한다고 했다. 아빠는 높이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건 질색이라고 했다. 나는 아빠가 "질색이야~"라고 말하는 표정이 웃겨서 후룸라이드를 타자고 했다. 그런데 얘기를 하는 사이 오빠가 소세지를 반 넘게 집어먹었다. 엄마가 같이 나눠 먹는 거라고 했지만 내가 고른 소세지를 왜 지가 저렇게 많이 먹는 거야? 게다가 아빠는 소세지를 하나도 못 먹은 것 같은데. 나는 오빠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알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 기분을 모르는지 장난을 걸어왔다. 나는 오빠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오빠의 장난을 무시하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소세지 좀 먹어."

  "아니야, 너네 먹어."

  "아니야, 오빠가 소세지 다 먹는단 말이야."

  "다 먹어도 돼. 또 사줄게."

오빠는 그 말을 듣고 신이 나서 소세지를 또 집어 먹었다. 나는 속이 뜨끈거렸다. 오빠를 쳐다보며 말했다.

  "와 진짜 돼지 같이 먹네."

  "어허, 소민이 오빠한테 왜 그렇게 말하지?"

나는 오빠를 째려봤다. 오빠는 그제서야 내 기분이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포크를 내려놨다. 오빠는 소세지를 내 앞으로 밀며 말했다.

  "이거 너 다 먹어."

나는 소세지 세 조각을 내려다봤다. 문득 이게 뭐라고 오빠에게 그런 소리를 했나 싶었다. 아빠가 먹는 거로 눈치 주는 게 가장 치사한 거라고 했는데. 나는 내 눈치를 보는 오빠가 불쌍해졌다. 그리고 이런 일로 짜증을 내는 내가 싫었다. 나는 한 입도 더 먹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아니야, 장난이었어. 오빠 다 먹어. 나는 배불러."

오빠는 씨익 웃으며 남은 소세지들을 먹었다. 오빠가 단순한 게 가끔은 고마울 때도 있었다.


우리는 점심을 다 먹고 후룸라이드를 타러 갔다. 후룸라이드는 줄이 훨씬 더 길었다.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후룸라이드는 재미있을테지만, 나는 왠지 세 가지 숙제 같은 놀이기구 타기를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나와 오빠를 위해 놀이공원까지 와준 엄마, 아빠를 생각해서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즐거운 척을 했다.

  "아빠, 후룸라이드 타다가 사진도 찍히나봐."

  "그렇네. 사진 찍을 때 나오게 머리띠 사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왜, 아빠가 사줄게."

나는 은근히 기뻤다. 아까부터 분홍색 고양이 머리띠를 쓴 여자애들에게 자꾸 눈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 아빠도 그걸 눈치챘을 것이다. 어린이의 표정은 숨길 수 없으니까. 나는 몇 번을 사양한 끝에 마지못하는 척하며 말했다.

  "그럼 나는 분홍색 고양이 머리띠..."

아빠는 얼른 사오겠다며 오빠를 데리고 줄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두둥실 뜨는 것 같았다. 분홍색 고양이 머리띠 하나만 가져도 오늘 하루는 성공적일 것 같았다. 난 후룸라이드가 너무 재미있겠다는 둥 물을 맞으면 시원할 것 같다는 둥 두서 없는 얘기를 쏟아내며 엄마의 팔에 매달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빠와 오빠가 저 멀리서 걸어왔다. 오빠는 비눗방울이 나오는 총 장난감을 손에 들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비눗방울을 쏘며 왔다. 아빠 손에는 머리띠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분홍색이 아니라 오렌지 색이었다. 분홍색은 어디 있지? 나는 마음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빠가 줄 안으로 들어오며 머쓱하게 말했다.

  "분홍색은 다 팔렸더라고. 그래서 제일 비슷한 거로 사왔어."

말도 안됐다. 하나도 비슷하지 않았다. 어떻게 분홍색과 오렌지 색이 비슷하지? 나는 아빠가 쥐어준 오렌지 색 머리띠를 한참 바라봤다. 아빠가 옆에서 내 기분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난 얼음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분홍색 아니잖아."

  "말했잖아, 분홍색이 없었다고."

  "아빠는 분홍색이랑 오렌지 색도 구분 못해?"

  "소민아..."

  "왜! 왜 이거 하나 제대로 못 사다 줘! 왜! 내가 응? 내가 어려운 거 해달라는 거 아니잖아! 아빠는 도대체 왜 그래! 왜 그래! 분홍색으로 줘! 다른 애들 다 갖고 있잖아! 나도 똑같은 거 갖고 싶단 말이야! 나도!"

나는 머리띠를 바닥에 던지고 주저앉아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중엔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막 지껄였다. 나도 종이팔찌를 차고 싶다는 얘기도 한 것 같고 오빠가 소세지를 다 먹어버렸다는 얘기도 한 것 같다. 그냥 악을 쓰기 위해 생각나는 말들은 다 내뱉었다. 엄마, 아빠는 머리띠 하나 잘못 사왔다고 자지러지는 딸에게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다그치기도 하고 협박도 했다.

  "최소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어? 이러면 다음에 다시는 놀이동산 안 와. 어? 조용히 못해?"

  "나도 안 와! 이런 게 놀이동산이면 나도 다신 안 와! 다 커서 올 거야! 엄마, 아빠랑 안 오고 나 혼자 올 거야! 나 혼자 와서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결국 아빠가 나를 들쳐 안고 등을 토닥토닥거리며 어르고 달랬다. 나는 아빠 목을 끌어 안고 통곡했다. 어리둥절한 오빠는 울지 말라는 듯 내게 비눗방울을 쏴주었다. 나는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자 아빠는 나를 내려놓고 말했다.

  "소민아, 아빠가 미안해. 이거 타고 분홍색 머리띠 찾으러 가자. 아빠가 꼭 사줄게."

나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 주웠는지 아빠 손에는 오렌지 색 머리띠가 들려있었다. 나는 머리띠를 아빠 손에서 빼 머리에 썼다.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 아빠 손을 잡고 가만히 서있었다. 엄마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민이 그 머리띠 쓸 거야? 그것도 괜찮아?"

나는 끄덕거렸다.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어진 느낌이었다. 아까 악을 쓰면서 기대나 소망 같은 것들도 다 뱉어낸 것 같았다. 난 기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멍하니 차례를 기다렸다. 오빠가 장난을 걸면 거는 대로 적당히 받아주었다.


오랜 기다림과 소동 끝에 우린 후룸라이드를 탔다. 후룸라이드는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난 전까지의 일들은 다 잊고 즐거워진 척했다. 후룸라이드를 타면서 찍힌 사진을 보고서도 까르르 웃었다. 아빠는 기념품 가게에 가서 분홍색 고양이 머리띠를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난 말렸다.

  "이것도 좋아. 다시 보니까 이 색이 더 예뻐."

난 터진 베개를 꿰매려는 사람처럼 애썼다. 그러다 보니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 놀이동산에 괜히 왔다고 생각하느니 나 혼자만 서글픈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빠는 쉬가 마렵다고 했다. 아빠는 오빠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그동안 엄마와 나는 알라딘의 성 앞에서 기다렸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별로 인기가 없는 놀이기구여서인지 알라딘의 성은 줄이 짧았다. 알라딘의 성은 성 안에 들어가 볼 풀과 그물망, 거울의 방 같은 걸 지나 자스민 공주를 구하는 놀이기구였다. 나는 팬스에 매달려 알라딘의 성에 입장하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그때 지니 분장을 한 안내 요원이 다가왔다.

  "안녕 친구? 친구는 왜 알라딘의 성에 안 들어와요?"

  "아 저는 세 개를 다 썼어요."

나는 다 쓴 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지니는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검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니는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에요. 이리 와서 내게 손목을 보여주는 척하면 지니가 특별히 알라딘의 성에 들어가도록 해줄게요."

나는 깜짝 놀라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화장실에 갔던 아빠와 오빠도 멀리서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을 하며 걸어왔다. 나는 지니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오빠도 같이 들여보내줄 수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나는 펄쩍펄쩍 뛰며 오빠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오빠도 뭔가 기분 좋은 일임을 느꼈는지 파바박 뛰어왔다. 나는 비밀이라는 뜻으로 "쉿!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지니는 웃으며 말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요!"

나와 오빠는 알라딘의 성으로 뛰어들어갔다. 우리는 서로 볼풀을 던지고 샌드백 사이를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종종 바깥에 앉아 있는 엄마,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는 우리를 눈으로 좇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엄마, 아빠는 서로 뭐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알라딘의 성에서 노는 순간 만큼은 자유이용권이라든가 고양이 머리띠에 대해 다 잊어버렸다. 내 웃음소리와 오빠의 웃음소리, 정신없이 눈 앞을 왔다갔다 하는 장애물들만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손등에 자스민 공주 도장을 받고 알라딘의 성에서 나왔다. 엄마, 아빠도 웃으며 걸어왔다. 뭔가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

  "다음에는 자유이용권 끊어서 오자. 종이 팔찌 차고 다니자."

  "응."

나는 아빠에게 안겨 잠이 들었을까. 그때부터의 기억은 흐릿하다. 아빠가 차에 나를 눕힌 것과 고양이 머리띠를 빼준 것, 집에 도착해 나를 안고 집에 들어간 것 정도만 드문드문 떠오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2년 5월 일기 모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