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May 18. 2022

<나의 해방일지> 속 단어들

낯설고 정확한 말

자고로 드라마는 움찔거리며 보는 맛이 있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저런 대사를 친다고..? (움찔)

  냅다 키스를 갈긴다고...? (움찔)

  저걸로 싸대기를 후려친다고..? (움찔)

볼 땐 '왜저래..' 하며 보지만 이런 움 요소들이 없고 생각하면 아쉽다. 누군가의 매력적인 단점 같은 느낌.


요즘 보는 드라마의 움찔 요소는 이 대사다.

  나를 추앙해요.

12화까지 봤는데 아직도 움찔한다. <나의 아저씨>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대사다. 드라마를 안 본 사람도 이 대사는 알 만큼 유명해졌다.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표현들은 전반적으로 범상치 않다.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이 아니라서 들으면 마음이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덜컹한다. 몰입을 깨는 덜컹이라기보다, '저렇게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깨달음의 덜컹이다. 표면에 있는 생각을 훑어서 쓴 게 아니라 마음 깊이 있는, 모순적이고 말이 안 되지만 진실 더 가까운 어들.


그 중에서도 반복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추앙', 추앙과 같이 쓰이는 '채워짐', 제목에 들어간 '해방'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추앙한다가 대체한다. 11화 마지막에 구씨가 미정이에게 "추앙한다"고 말할 때 확신했다. 사실 추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모험이었을지 모른다. 드라마 중간 기정의 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추앙이라고 하면 그 어떤... 장군 동지를 받들어 뫼시는.. 그 어떤 족장님을 우가우가 숭배하는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로맨틱한 느낌이 호다닥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추앙한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작가님 의도를 사랑보다는 추앙이 더 정확히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이제 너무 많이 쓰여서 쓰는 사람마다 뜻이 다르다. 닳 닳았다. 남녀의 로맨틱한 느낌에 치중때도 있고, '너는 이래야 해. 내 말 들어. 다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라며 상관 없는 것을 사랑에 끼워팔기도 한다. 사랑에 대해 떠올리는 게 각자 다다. 하지만 추앙은 그렇지 않다. 나는 근 몇 년 간 이 단어를 입 밖에 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추앙한다고 하면 바로 머리에 그려지는 게 없다. '뭘 어쩐다는 거지' 싶다. 오히려 렇기 때문에 이 단어를 통해 의도를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백지니까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되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추앙한다는 응원한다는 뜻으로 설명된다. 나는 덕질과 비슷한 라고 생각했다. 좋아하기만 하는 것. 지지하기만 하는 것. 칭찬하기만 하는 것. 매일 술을 마셔도 마시지 말라는 소리 안 하고 과거에 어땠는지, 신상정보는 무엇인지 묻지 않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고, 곁에 있어주면서 전적으로 응원하고 무엇이든 다 괜찮다고 해주는 것.


추앙의 뜻을 생각하다 보니 나는 추앙 받아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전적인 사랑과 응원. 걷기만 해도 박수를 받고 밥만 잘 먹어도 칭찬을 듣고 똥 싸도 예쁨 받던 때. 이 시기에는 뭔가를 한 대가로 사랑 받는 게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하게 사랑 받다. 이게 추앙이 아니면 뭐야.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고 느낀 건, 인간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로 받은 절대적인 사랑과 응원으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때의 채워짐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극복하는 힘이 되고,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근거가 된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미정은 부모로부터도 전적인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정은 어린 시절에도 채워진 적이 없다.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미정은 조용히 지쳐간다. 채워져본 적 있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무언가가 미정에겐 없다. 그래서 그렇게 추앙받길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면서 추앙받을 두 번의 기회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아주 어릴 때, 그리고 부모가 되었을 때. 어린 아기도 부모를 추앙한다. 부모가 어떻게 하든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다리고 관심을 갖고 좋아한다. 이것도 추앙이 아니면 뭐야. 부모가 된 사람들이 말하는, 아이가 생겼을 때 느끼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충만함은 아이가 부모를 추앙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닐까. 아이로부터 추앙 받으며 채워지는 것이다. 부모와 아이는 그렇게 서로 추앙하고 서로 채워지는 관계가 다. 만약 이때 서로 충분히 추앙하지 못하고 추앙받지 못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서러움과 공허함 평생에 걸쳐 마음에 남는다.


일상적으로 추앙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연인끼리도 친구끼리도 사실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순수하게 추앙하는 건 너무 어렵다. 추앙하려면 추앙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뭔가를 증명하고 해내야만 추앙 비슷하게라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추앙은 이상적이다. 비현실적이다. 미정처럼 한 번도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채, 이 공허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른 채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 드라마에서 추앙만큼 많이 쓰이는 표현은 '해방'이다. 번에 퇴사와 이별을 동시에 었다. 나는  자유롭기 위해 이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알았다.

  나는 자유를 원했던 적이 없구나. 나는 해방을 원했구나.

내게 자유가 생겨도 사실 나는 그 자유를 갖고 할 것이 없다. 갑자기 턱없이 많아져버린 유를 그저 멀뚱히 바라볼 것이다. 그러니까 난 자유를 원했다기보다 정확히는 갇혀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되길 원다. 넓고 푸르른 잔디를 달라는 게 아니라 감옥에서 빼내달라는 것이었다. 자유일지가 아니라 해방일지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드라마 속 단어들은 또 한 번 정확해진다.


정과 해방클럽 회원들은 해방되고 싶어한다. 지겨운 인간들로부터,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언제부턴가 벗을 수도 없게 된 가면으로부터. 하지만 드라마 대사에도 나왔듯 퇴사를 해도, 이혼을 해완전히 해방되진 않는다. 어딘가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해도 곧 또 다른 곳에 갇힌다. 회사에서 해방되어도 다시 금전 문제에 갇힌다. 관계에서 해방되어도 다시 외로움에 갇힌다. 해방은 일시적인 느낌일 뿐 우린 늘 다시 어딘가에 갇힌다.


인간은 원래 해방될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해방은 날아오르는 것이다. 무게감 없이 훨훨. 하지만 인간은 중력의 영향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이 묶여있다. 영원히 중력에 갇혀 날아오르지 못한다. 력이 있는 한, 인간인 한, 살아있는 한 해방은 불가능하다. 그저 <그래비티>의 마지막 장면처럼 두 발로 우뚝 서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해방은 이상적이다.


추앙도 채워짐도 해방도 요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신포도 이야기처럼 추앙이고 해방이고 못 본 척한다. '어차피 불가능해'하며 추앙 받지 않고 해방되지 않은 상태에 적응하려 한다. 하지만 미정은 추앙 받길, 해방되길 욕망한다. 추앙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행복을 과장하지 않고 불행도 과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스스로를 보며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지 써내려간다. 미정도 욕망이 진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닐 지 모른. 하지만 그래도 해다. 죽을 것을 알지만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는 것처럼. 그게 어쩌면 인간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질 것을 알지만 지기 직전까지 싸우는 것. 채워지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추앙하고 추앙받길 갈구하는 것. 해방되지 못할 걸 알지만 그래도 해방되기 위해 애쓰는 것. 언제까지나 그 과정에 서 있는 존재가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