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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Nov 20. 2022

권태롭거나 암울하거나 두려울 때의 나에게 쓰는 편지

일이 많아보이네. 혹시 잠만 자고 다시 회사에 나가봐야 하니? 실수나 큰 잘못을 해서 지적당했니?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이야.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누구와도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잘한다고 생각했던 일도 이제 보니 별로 그렇지 않아? 그런 날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야. 우리는 불행이 남에게 일어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나만은 피해가길 바라지.


눈 앞의 나쁜 일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면 한 가지를 기억하자. 인생은 산책이라는 걸. 좋은 산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코스를 잘 골라야 할 거야. 사람이 너무 많지 않고, 평탄하고, 시끄럽지 않고, 나무를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거고, 천을 따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 중간중간 들를 수 있는 편의점이나 카페가 있어도 좋겠지. 좋은 코스인지는 직접 걸어봐야 알 수 있어. 어렵사리 좋은 코스를 고른다고 해도 어느 날 '공사중'이라는 표시와 함께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될 수도 있어. 그럴 땐 다른 길을 또 찾아야겠지. 그 길이 좋은 길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나쁜 길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어. 우리는 길을 걷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 어떤 길이든.


좋은 산책에는 또 뭐가 필요할까? 편안한 신발을 신는 것. 적절한 속도와 자세로 걷는 것. 무리하지 않는 것 정도가 있겠지. 함께 걸을 누군가가 있어도 좋을 거야. 낙엽에 대해, 거리의 가게에 대해, 요즘 드는 고민에 대해 얘기할 누군가 말이야. 물론 나와 잘 맞는 동행자가 누구인지도 걸어봐야 알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어. 바로 날씨야. 산책의 성공 여부는 8할이 날씨에 달려 있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산책의 운명이 달려 있는 거야. 그런 예측불가함 앞에 무력해진다는 걸 알아. 비가 오면 어쩌지,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 수준이면 어쩌지. 하지만 늘 비가 오거나 늘 무더운 날씨는 없어. 날씨는 나쁠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어. 날씨가 우리에게 해주는 유일한 약속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날씨가 좋을 때는 좋은 날씨를 즐기고, 날씨가 나쁠 때는 나쁜 날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거야. 생각보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그저 걷고 겪을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말했다시피 비가 오면 언젠가는 개고, 무더우면 언젠가는 선선해지고, 안개가 끼면 언젠가는 걷혀.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 배운 '세옹지마'와 다를 바 없는 얘기인데. 그 뜻을 꼭꼭 씹어 먹어 소화시키기까지는 정말 긴 시간이 걸렸네. 내가 좋아하는 책에 나와있는 것처럼,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야. 그 약속을 믿고 걸어나가주길 바래. 가끔 쉬고 가끔 걷고 가끔 돌아보면서.


권태롭거나 암울하거나 두려운 나야.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말아줘.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차라리 쉬어줘. '그랬다가 멀리 못 가면 어쩌지?'라는 걱정도 말아줘. 집 앞 마당까지만 가도 괜찮아. 어차피 산책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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