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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Dec 23. 2022

2022년 회고

이자 그저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돌아다녔던 20대 회고

※글이 깁니다. (7600자)

※세 가지 콘텐츠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다짐합니다. ‘올해 연말은 뻑쩍지근하게 보내리.’ 하지만 사실 뻑쩍지근하게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지 잘 모릅니다. 그것도 해본 사람이나 하는 것이겠죠. 그런 생각을 하다가 회사에 다니다가 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12월이 갑니다. 그럼 12월 31일에 MBC 가요대제전을 보는 정도로 한해를 마무리 합니다. 가요대제전도 썩 나쁘진 않습니다.


2022년 12월 1일 밤, 자려고 누워 이불을 덮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도 MBC와 함께 하려나. 하지만 올해만은 정말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스물아홉이거든요…. 어쩔 수 없이 나이에 집착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러다 ‘올해를 그냥 보낼 수 없어! 2022년을 회고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노잼이...’라고 생각해도 이해합니다. 그렇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글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만 읽으셔도 됩니다. (안 됩니다….)


올해도 여느 해와 같이 여러 가지를 보고 들었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세 가지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책 두 권과 영화 한 편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벽>,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만 나가지 말아요….


첫 번째는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입니다. 올해 여름부터 우리나라에서 확 떠서 지금도 잘 팔리는 걸로 압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화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합니다.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고 혼돈 그 자체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19세기 과학자에 대해 알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가장 절망적인 때에도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화자는 데이비드의 인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집요하게 쫓습니다. 데이비드는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기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화자는 데이비드를 보며 목적과 자기 확신이 삶을 이끌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곧 데이비드가 ‘우생학’과 ‘적합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역시 목적과 자기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화자는 길을 잃은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그들은 서로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주고,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구슬을 꿰며.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합니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에서는 사람 하나하나가 무의미하겠지만,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이라고.


두 번째는 마를렌 호퍼의 <벽>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화제가 된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투명한 벽이 생겼습니다. 주인공은 벽 안에 갇혔습니다. 벽 밖의 사람들은 아마도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벽이 왜 생겼으며, 벽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인 줄알았습니다. 하지만 읽어 보니 주인공이 벽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고양이, 강아지, 소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이 장작 패고 집 고치고 소 젖 짜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월든>이나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이야기 마지막 쯤에 주인공이 아끼고 의지하던 강아지가 죽습니다. 주인공은 죽은 강아지를 그리워하며 생각합니다. ‘이 벽 안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살 수 있다.’ ‘사랑보다 더 현명한 감정은 없다. 이것만이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유일한 가능성이다.’ 작가는 벽이라는 장치를 통해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인간이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문학적으로 실험해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는 가장 최근에 본, 전세계에서 존잼이라고 난리가 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저는 이걸 동생과 심야영화로 봤습니다. 이제까지 본 뇌절 영화 중에 가장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블린. 그리고 에블린의 딸 스테파니. 스테파니의 몸 속에 조부 투바키가 들어갑니다. 조부 투바키는 멀티버스를 자유자재로 다룹니다. 조부 투바키는 세계관 최강자지만 그 때문에 삶이 허무하다고 느낍니다.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해봤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 했거든요. 조부 투바키는 허무한 세상을 떠나 블랙홀로 사라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조부 투바키가 들어가 있는 스테파니도 사라집니다. 에블린은 스테파니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에블린들의 능력을 빌려와 조부 투바키와 싸웁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조부 투바키가 블랙홀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이자 딸 스테파니)에게 말합니다. “모든 곳에서(everywhere) 모든 것으로(everything) 존재할 수 있지만 난 지금 이 순간 여기 너와 있고 싶어.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너랑 여기 있고 싶어.” 수많은 멀티버스를 경험하고도 허무함에 소멸하려고 했던 조부 투바키는 그 말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소개한 책 두 권과 영화 한 편은 각각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한 가지는 제가 20대 내내 생각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보았거나 오랫동안 품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대학생 때 제 별명은 ‘쓸부’였습니다. ‘쓸데없이 부지런하다’의 줄임말입니다. 저는 수업이 12시면 2시간 전부터 강의실 앞 로비에 앉아 있었습니다. 약속이 6시면 3시간 전부터 근처 카페에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뭐하고 있었어?”라고 물으면 “수업 기다렸지” 혹은 “약속 기다렸지”라고 했습니다. 이에 친구들이 “넌 참 쓸데없이 부지런하구나”라고 하여 쓸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저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돌아다녔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간편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실히 강의를 듣고 복습을 조금 하고 나면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의 시간은 강과 같이 흐르고 낙엽처럼 널부러져있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왜 나는 시간이 많을까?’ 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1순위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9세까지는 공부가 1순위였는데 20세부터는 그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지 않습니까. 그럼 난 뭘하나… 그때부터 저의 1순위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누구나 시작하지만 대부분 끝내지 못하는 여정이라는 걸.


처음엔 제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았습니다. 이 정도의 고민일 때가 가벼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점점 근본적인 걸 알고 싶어졌습니다. ‘나만의 1순위가 아니라 인간의 1순위는 뭐지?’ ‘가장 중요한 것, 달성해야 하는 건 뭐지?’ 인생이 제게 무엇을 감추고 쉬쉬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직접 겪고 배우기보다 누가 미리 겪고 어디에 써놓은 결론을 날름 집어먹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주로 책을 보며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문학이 진리인 것 같으면 소설을 보고, 과학이나 우주가 진리인 것 같으면 과학책을 보고, 철학이 진리인 것 같으면 철학책을 봤습니다. 막 탐독했다기보다 몇 장 읽어보고 ‘진리가 이렇게 노잼일 리 없어!’ 하고 덮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혹시 이 책엔 답이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은 알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답을 찾았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감춰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게 다였습니다. 내가 감각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부모님이 내가 성인이 되면 주려고 당장 현금화 가능한 5억(세후)과 빌딩 두 채를 숨겨놓으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은 없고 학자금 대출 1,500만 원이 다라는 걸 알게 된 사람처럼 허탈했습니다. 크게 울고 싶기도 하고 울기 조차 싫기도 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화자가 데이비드의 삶을 추적한 이유였던, <벽>의 주인공이 벽에 갇혔을 때 느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조부 투바키를 블랙홀에 뛰어들게 했던, 그 허무였습니다.


허무하다는 생각을 한 후로 비슷한 꿈을 종종 꿨습니다. 제가 관 안에 있는 꿈이었습니다. 관 속의 저는 자는지 죽었는지 눈을 감고 미동이 없습니다. 전지적관찰자 시점으로 보니 관은 하늘 위에 떠있습니다. 관 아래로, 아득히 먼 세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나무가 살고, 불이 켜지고, 불이 꺼지고, 자동차가 다니고, 흰 새가 다니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낮이 가고 밤이 갑니다.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갑니다. 10년이 가고 100년이 갑니다. 만 년이 가고 천만 년이 갑니다.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운 종족이 지구에서 살아갑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태양이 수명을 다합니다. 태양계가 소멸합니다. 우주는 가속팽창하기 때문에 우리은하의 행성들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별과 별 사이가 너무 멀어져 이제 다른 별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지구라는 것이 있었나, 인류라는 것이 있었나, 회사라는 곳에 다녔었나, 누군가와 밥을 먹었었나, 이야기를 나누었었나. 그런 것들이 우주 어디선가 다시 시작될까. 아니면 그런 것은 이제 영영 없을까. 그 와중에도 저는 관 속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리고 꿈에서 깹니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저는 표정 없이 아침을 맞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문득 하던 일을 멈추고 먼 곳을 봤습니다. 재미있는 걸 보고 웃다가도 갑자기 웃음을 멈췄습니다. 허무한 삶이 무섭고, 의미 없이 죽을 것이 무서웠습니다. 살기 위해 뭔가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인생의 겉을 핥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모두를 잃는다는 사실만이 자명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말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런 무력감으로 20대 후반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늘 우울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늘 ‘이건 근본적인 게 아니야. 잠깐의 감정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한 순간이 허무를 이기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기진 못했지만 그런 순간들 덕분에 버틸 수는 있었습니다. 잠깐은 허무를 잊기도 하고 잠깐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하고 잠깐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잠깐, 잠깐, 잠깐이 이어져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그런 잠깐은 언제였나 생각해봤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을 만난 날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빠가 됐다고 했습니다. 어서 아이가 커서 같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냐고 묻자 동요를 부르고 싶다고 했습니다. 동요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동요를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멋쟁이 토마토, 개똥벌레, 과수원길… 복날송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복날송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어떤 노래인지 설명해줬습니다. 복날에 개랑 닭이랑 니가 더 맛있네 내가 더 맛있네 하는 노래라고. 사람들이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릴 땐 그런 노래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우유송, 당근송, 숫자송. 누군가 숫자송에 ‘60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이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제 지구촌 인구는 60억 명이 아니라 80억 명이라고 했습니다. 가사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도 가사가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00리가 아니라 뱃길따라 87K로 바뀌었다고. 우리는 무슨 동영상 화질 같다고 했습니다. 이럴 거면 뱃길따라가 아니라 구글맵따라로 바꾸지 그랬냐고.


…… 그러니까 그냥 이런 얘기를 할 때였습니다. 제가 허무를 잊을 때는요. 돌아서면 잘 기억도 안 나고 어디 써먹지도 않는 이런 얘기를 하는 시간. 제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퇴근 후에 동생이랑 떠드는 시간입니다. 동생은 타짜를 마흔 번 정도 봤는데요. 그래서 대사를 줄줄 읊습니다. “누나 돈 땄으면 가야지!!” “고니는 가지마~” “안 가고 뭐하니~? 누나 돈 땄으면 가야지!!!” 극적 요소를 가미해서 성대모사를 하면 저는 저항 없이 웃습니다. 그러다 뜬금 없이 아이패드를 사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그러다 뜬금없이 웹툰 작가가 되겠다는 얘기를 하고 그러다 뜬금없이 앞으로 연애하기는 틀렸다는 얘기를 하고 그러다 뜬금없이 “우리 조세호와 남창희, 지석진과 김수용 같지 않냐”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보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런 시간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나온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이자 <벽>에 나온 ‘가장 현명한 감정’이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조부 투바키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온 그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허무합니다.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누군지도 모를 거라는 예감은 이제 운명처럼 느껴집니다. 허무함은 저의 일부입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것이 있다면 허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이런 상태로 남은 날들을 살아야 할 겁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렸고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더 오래 걸렸습니다. 허무가 부정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고 느끼기까지는 더 오래 걸릴 거라고,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버틸 지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린 수다를 떨면서 이 시간을 건널 수 있을 겁니다. 그 시간 뒤엔 영겁의 ‘무’가 있겠죠. 그것을 생각하면 다시 허무해지지만 그럼 다시 수다를 떨며 또 허무를 잊을 겁니다.


이것이 제 회고록의 결론입니다. 허무에 대한 임시방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20대를 끝내며 내리는 소결론입니다. 저는 아직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이 결론은 최종 버전이 아닙니다. 저는 이 글을 끝내는 순간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했던 고민에 대해, 저를 관통하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매듭지은 덕분에 저는 다시 일어나서 또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날엔가 ‘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글을 쓸지도 모릅니다. 미래의 제가 꼭 그런 글을 써주길 바라며, 저의 회고록과 저의 20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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