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깔짝깔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빵떡씨 Aug 27. 2022

2022년 8월 일기 모음

8/1

나는 어느 순간 알았던  같습니다. 나는 주인공이   없다는 걸요.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지만 그런 말이  괴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글을   같습니다. 주인공은   없고 조연도 싫어서 작가가 되기로 했나봅니다. 관조자는 주인공과도 조연과도 비교되지 않으니까요. 지켜보는 사람의 신분으로 기를 택했나봅니다.


8/2

주짓수를 하면서 어느 정도의 애정과 어느 정도의 열심을 기울였을 때 내가 상하지 않으면서도 실력을 기를 수 있는지 알게 됐다.


8/3

늘 빵 만드는 일 같은 걸 하고 싶었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오고 그걸로 누군가의 배를 부르게 하거나 부드럽고 따듯하다는 느낌을 주는 일. 누군가의 포도당이 되는 일.


8/4

효석이 자소서를 쓴다고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레퍼런스를 몇 개 보내줬다. 효석은 다 읽더니 "이럴 줄 알았어... 그저 남의 인생을 빼앗아 살고 싶다는 생각 외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라고 했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겠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능숙히들 숨기고 살아가는지 신기하다.


8/5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쓴 글과 책을 더 적극적으로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시기 질투가 많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쓰면서도 글을 즐길 수 있을까요. 답을 안다면 알려주세요.


8/7

인생에서 '지금 딱 이렇게 되면 정말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순간 정말 딱 이렇게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8/10

잠이 들고 싶은 건지 들고 싶지 않은 건지 헷갈린다. 내가 했던 말과 썼던 글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고 쓴 건지 아니면 그저 지어낸 건지 알 수 없다.


8/12

몇 년 전에 뮤직 패스티벌에 갔었다. 사람들이 가수를 보려고 무대 가까이에 몰렸다. 나도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앞 사람에 바짝 붙어섰다. 한참 동동거리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봤다. 나는 무리 중간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맨 뒤쯤 있었던 거다. 기를 쓰며 무리에 매달려있을 필요가 없었다. 몇 걸음 물러났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살았던가 생각했다.


8/15

도현이 내가 물놀이하는 걸 보고 말했다. 뭘 잘 시작하진 않지만 시작하면 잘 끝내지 않는다고.


8/17

나른한 우울. 느긋한 비관.

나는 모순된 사람이다. (사실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나를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그냥 모순되는 대로 단어들을 붙여보았다. 그러자 나를 잘 묘사하는 두 문장이 생겼다.

나의 감성은 모순되지만 사실 한결같았다. 묘사하자면 이런 것이다. 면접을 망치고 집에 가는 길,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면접에 떨어질 거라는 강력한 예감에 분명 가슴 깊이 슬프건만, 면접 중에 있었던 어떤 웃긴 일이 떠올라 자꾸 웃음이 새어나온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음침하다. 기본적으로 우울한 와중에 순간순간 웃긴 바이브가 늘 내 안에 있었다. 이런 감성은 나를 설명할 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나의 모든 것이기도 한 것 같다.


8/19

동네에 '이정희 떡볶이'라는 떡볶이집이 있다. 전부터 그 집 떡볶이를 먹고 싶었다. 벼르다가 오늘 점심에 갔다. 에어컨을 틀어주시지 않아서 시원하지 않았다. 덥지도 않았다. 송가인 싸인이 붙어있었다. 떡볶이 1인분, 어묵 1인분, 김말이 1인분을 주문했다. 양이 많을 것 같았지만 많이 먹기로 했다. 초등학생 세 명이 내 뒷자리에 앉았다. 떡볶이 2인분을 시켰다. 주인 아주머니가 초등학생들한테 어묵 국물을 주셨다.

  "오뎅 국물을 떡볶이 먹기 전에 먹을까 다 먹고 나서 먹을까?"

  "따뜻할 때 먹어야지."

  "아니 다 먹고 매울 때 먹어야지."

걔들은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떡볶이를 다 먹고 나서 먹기로 합의했다. 나는 '떡볶이 먹기 전에도 먹고 다 먹고 나서도 먹으면 되지...'라는 어른스러운 생각을 했다. 이래서 어른이 되면 재미가 없어지는 걸까. 어린이들은 오뎅 국물 먹는 순서로도 저렇게 열띠게 떠드는데, 어른은 심드렁히 대충 처먹지 뭐... 해버리니까.

  "우리 엄마는 청소를 안 해."

  "우리 엄마는 청소도 안 하고 빨래도 안해. 설거지는 아빠...도 안 해."

  "야야 먹고 잊어."

  "이제 오뎅 국물 먹어도 돼?"

  "응."

엄마, 아빠가 청소를 안 하는 것은 초등학생들에게 먹고 잊어야 하는 일이구나. 나는 결국 시킨 것을 다 먹지 못했다. 혼자 와서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이 시킨 어른은 갑자기 외로워졌다.


8/20

내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내가 그만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다.


8/21

'헤어질 결심' 대본집을 읽었다. 너무 로맨틱해서 울 뻔했다. 대본집을 본 후로 이상한 술버릇이 생겼다. 옆사람을 보고 영화 대사를 말한다.

  "서래씨.. 내가 서래씨 왜 좋아하는지 궁금하죠? 안 궁금하댔나... 서래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고 그렇게 똑바른 사람은 드물어요. 난 그게 서래씨에 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8/22

어떤 것에 대해서든 어느 정도 이상 복잡해지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생각에 골몰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나면 그게 꼭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8/23

이제 주변 사람들이 내 취업에 대해 슬슬 걱정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걱정을 사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


8/24

샤워를 하고 반팔을 입으면 서늘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걸어다닐 때 발과 방바닥 사이에서 쩍쩍 소리가 아닌 삭삭 소리가 나는 날씨가 되었습니다. 가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심난히, 태연히, 유유히. 나의 이십대가 가는 것처럼.

사랑을 하고 싶기도 돈을 벌고 싶기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고,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8/25

<원피스> 같은 만화를 보면 그런 캐릭터들이 있다. 앉은 자리 바로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이거 곤란하게 됐는걸"하곤 휘릭휘릭 해결해버리는 캐릭터. 어떤 큰 일도 '곤란' 정도로 치부한다. 아무 타격도 없다는 듯 여유롭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캐릭터를 동경했다. 나는 불안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없는 걸 가진 캐릭터가 부러웠다. 나는 불행의 그림자만 보여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왜 이렇게 태어나서 한 번 사는 세상 이토록 불안하고 불안하고 또 불안하게...


8/27

인천에 프리랜서이자 자영업자인 언니를 보고 왔다. 언니에게 줄 편지를 썼는데 까먹고 가져가지 않았다. 내용은 별 게 없는데 엽서가 예뻤다.

  '언니, 언니가 웃으면 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언니를 자꾸 웃기고 싶습니다. 그거 대단한 장점입니다. 잊지 말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