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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Mar 12. 2023

포장이사 추천사

이사를 했다. 전에 살던 집의 전세 계약이 끝났기 때문이다. 살던 동네가 좋아서 같은 동네에 집을 알아봤다. 이전 집 5분 거리에 있는 집을 계약했다. 전세금이 묶여있던 4년 동안 가진 돈의 가치는 떨어지고 서울 땅의 가치는 월등히 높아져 전세금은 8천이 올랐는데 평수는 줄었다.


이사할 때 포장이사를 불렀다. 견적이 140만 원이 나와서 충격적이었다. 5분 거리로 짐을 옮기는 데 140만 원이 든다니. 눈물이 났다. 이 업체 저 업체에 견적을 받아 봐도 비슷했다. 할 수 없이 140에 포장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사를 마친 지금, 나는 140이 너무 적은 액수는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사 과정을 지켜보며 프로의 세계를 살짝 엿본 기분이 들었다. 5년 넘게 사회 생활 하면서 '우리 과장님은 프로야!'라는 생각이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프로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5인 1조 팀이었는데, 한 명은 주방 담당이고 한 명은 총괄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 같은 느낌이었다. 나머지 세 분은 한 마디도 안 하고 묵묵히 일만 하셨다.


전 집에서 짐을 내릴 때 사다리차를 이용했다. 사다리를 창틀에 걸쳐야 하는데 창문 바로 앞에 과하게 발육한 덩굴 같은 전깃줄이 한 뭉텅이가 있어서 사다리를 올릴 수가 없었다. 그때 총괄하는 분이 전깃줄 뭉텅이를 어깨에 이고 밧줄로 둘둘 묶었다.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서 묶은 밧줄을 집 맞은편 건물쪽으로 당겼다. 그랬더니 전깃줄과 창문 사이에 공간이 생겨 사다리를 넣을 수 있었다. 심약한 나는 밧줄을 당길 때 전깃줄에 연결된 전봇대 세 개가 우지끈 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하는 분들은 사다리차를 에이스 침대처럼 편안히 타고 내리셨다.


짐을 싸고 트럭에 실을 때도 잔챙이들부터 안쪽에 착착, 큰 짐은 바깥에 착착 넣으셨다. 그래야 짐을 뺄 때 큰 짐 먼저 내려서 배치하고 그 다음에 잔챙이들을 정리할 수 있다. 짐을 풀면서 쓰레기나 뽁뽁이 처리도 동시에 하셨다. 마치 요리와 설거지를 동시에 하는 것처럼. 노는 손 하나 없이 5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였다.


나는 큰 짐만 툭툭 배치해주고 가시는 줄 알았는데 거의 생가 복원 수준으로 정리해주고 가셨다. 가스레인지 위에 후라이팬 두 개와 책장 위에 전기 파리채를 올려 놓은 디테일까지 똑같이 구현하고 가셨다. 심지어 냉장고 옆에 짜우 반점과 반올림 피자 쿠폰도 오와 열을 맞춰 붙여놓으셨다. 사진을 찍어서 비교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살짝 소름끼쳤다. 5인 1조 이사맨들은 물걸레질까지 싹 조지고 쿨하게 떠났다.


나는 완벽한 주거 공간 이동 서비스에 혀를 내두르며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었다. 반쯤 먹었을 때 나는 불현듯 '이사를 했으면 냉동실 전원이 나갔을 텐데 어떻게 아이스크림이 그대로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게 새로 사다놨냐고 물어보니 "아 이사하시는 분들이 냉동실에 있던 것도 안 녹게 옮겨 주셨어!"라고 말했다. 아... 이것이 프로의 경지인가.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이사를 마쳐드립니다!' 광고 카피로 써도 하늘을 우러러 과장 한 점 없다. 이것이 프로의 신뢰감! 안정감! 쾌감! 늘 '저 새끼가 10년 차...?' 하는 생각만 하던 내게 그들은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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