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9월 10일 ㅣ 날씨: 자살률 줄어드는 초가을 날씨
우리 팀은 H기관의 홍보 대행을 맡고 있다. 저번 주엔 H기관에서 행사가 몇 개 있었다. 다 끝난 건 아니고 아직도 몇 개 남았다. H기관은 행사 사진을 찍어서 자기들 SNS 계정에 올려달라고 했다. 그러겠노라 하고 대리님이랑 포토그래퍼랑 영상 찍는 분이랑 행사장에 갔다. 행사장에서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강 설명하자면 할머니, 회사원, 고등학생 등의 분장을 한 사람들이 나와서 격파를 하는 쇼였다. 차력쇼는 아니고 상징적인 퍼포먼스 느낌. 다들 진지해 보여서 나도 사뭇 엄격하게 있었는데 사실 기분이 묘했다. 몇 퍼센트 씩 부족한 분장과, 야끼만두 속 같이 별 거 없는 퍼포먼스와, 그에 비해 너무 많은 카메라와, 멀뚱히 서 있는 인력들이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마치 유적지에서 비니루를 발굴하고 "이게 오십 년은 족히 썩은 비니룹니다"라고 하자 다들 우르르 몰려와 인증샷을 남기고, '50년 묵은 비니루, 죠스 떡볶이 담았던 것으로 밝혀져'라고 대서특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행사가 대망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포토그래퍼의 원망스런 눈빛과 SNS에 올릴 게 없어 손가락을 쭉쭉 빠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렇게 나의 우려 속에 행사가 시작됐다. 진행자가 낭낭하게 뭐라뭐라 얘기를 했고, 본격적인 격파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근데 그때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비니루인지 야끼만두인지를 열 대의 카메라가 모여서 찍으니까 정말 그럴듯한 행사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2017년 하반기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되게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포토그래퍼들도 모두 프로였던지라 별 거 아닌 행사를-대리님 말을 빌리자면-'최순실의 남겨진 신발 한 짝을 찍는 것처럼' 열띠게 찍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슬금슬금 모였다. 대부분 '뭔 일이여'하고 와서 '별 거 아니네' 하고 갔지만 뭔일이여에서 별거아니네가 되는 1분 동안 그들은 행사장 근처에서 어슬렁댔으므로 다수의 1분이 모여 행사를 정말 흥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나는 그제야 H기관이 행사에 그렇게 많은 카메라를 부른 이유를 알았다. 찍을 게 있어야만 카메라가 모이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모이면 찍을 게 생기는 것이었다. 나는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기쁨에 마음이 부풀어 갈비뼈가 뻐근해졌다. 나중에 완성된 행사 스케치 영상을 봤는데 그건 더 그럴싸해보였다. 야끼만두가 왕교자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