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_아룬다티 로이

by 빵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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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
과일향이 진동하는 공기 중을 방종한 청파리들이 공허하게 윙윙댄다. 그러다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져서는 햇볕 속에서 당황한 채 죽어간다.
밤은 맑지만 나태와 음울한 기대가 베어 있다.

p12.
언덕 위 오래된 집은 귀까지 낮게 내려쓴 모자처럼 가파른 박공지붕을 이고 있었다.

p13.
이제 막 기억이 쌓이기 시작하던 시절, 삶이 '시작'으로만 가득하고 '끝'이란 게 없이 '모든 것'이 '영원'하던 그 어렴풋한 어린 시절

p14.
온화한 반달 같은 주름이 눈 아래 자리잡았고 그들은 암무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서른하나.

p16.
그 노란 성당은 슬픈 노랫소리로 가득찬 목구멍처럼 부풀어올랐다.

p18.
그가 직접 만든 하늘에서 어두운 별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성당의 뜨거운 바닥에 뼈가 부러진 채 널브러진 그의 두개골에서 비밀처럼 쏟아져나오는 검은 피를.

p19.
그 아이의 장례식이 그 아이를 죽였다.

p20.
그러고는 경찰봉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툭툭 쳤다. 가볍게. 툭, 툭. 마치 바구니에서 망고를 고르듯이. 포장해서 배달시키고 싶은 것들을 가리키는 사람처럼.

p21.
암무의 눈물에 그때까지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되었다.

p23.
저녁때면 낯선 벌레들이 망상처럼 나타나 베이비 코참마의 흐릿한 사십 와트짜리 전구에서 타들어갔다.
(중략)
기억의 폭탄이 잔잔한 홍찻빛 마음에 폭격을 가하듯 홍찻빛 고요한 물구덩이에 세찬 비가 융단폭격을 푸었다.

p29.
지나가는 기차 소리와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 떨어져내리는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라헬이 돌아왔다.

p30.
멀리서 남자가 외치는 것처럼 가슴에서 그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p31.
소피 몰을 잃은 '상실감'이 양말을 신은 조용한 무언가처럼 아예메넴 저택 안을 살며시 걸어다녔다.
(중략)
소피 몰을 잃은 '상실감'은 점점 더 강해지고 생생해졌다. 늘 거기 있었다. 제철 과일처럼. 계절마다. 공무원직처럼 종신적으로.

p33.
무심하고 무모하게 그린 선을 자신감으로 오해한 것이었는데, 사실 그 선을 그린 사람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었다.

p35.
여러 가지 절망이 서로 앞을 다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절망은 결코 충분히 절망적일 수 없음을.

p45.
오직 잡초 덩굴들만이 시체에서 발톱이 자라듯 계속 자랄 뿐이었다. 잡초가 분홍 석고 정령의 콧구멍으로 들어가 그들의 텅 빈 머리에 꽃을 피워, 석고상은 반쯤 놀라고 반쯤 재채기할 듯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p46.
하룻밤 새 일어났다. 금발 미인들, 전쟁, 기근, 축구, 섹스, 음악, 쿠데타, 이 모든 것이 한 기차로 도착했다. 그들은 일제히 짐을 풀었다. 그들은 한 호텔에 묵었다.

p50.
그들 모두 규칙을 어겼다. 모두 금지된 땅에 발을 들였다. 모두 법을 어겼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정해놓은 법칙을. 그리고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할머니를 할머니로, 삼촌을 삼촌으로, 어머니를 어머니로, 사촌을 사촌으로, 잼을 잼으로, 젤리를 젤리로 만드는 그 법칙을.

p51.
버스의 쇠 손잡이 같은, 그리고 그 손잡이를 잡았던 버스 차장의 손냄새 같은.

p68.
하지만 그후로 평생 그녀는 평상복을 입고 하는 작은 결혼식을 옹호했다. 그게 덜 잔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p76.
맘마치가 우는 것은 파파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구부정하게 피클 공장 주변을 돌아다니던 것에 익숙했고, 때때로 그에게 구타당하던 일에 익숙했다. 암무는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며, 별 희한한 것들에 다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p80.
"하지만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어." 차코가 설명했다. "왜냐면 우리는 밖에 있고 문은 잠겨 있거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본대로 보이는 것은 그림자뿐이지. 애써 들으려 해도 들ㄹ는 것은 속삭임뿐이지. 우리는 그 속삭임을 이해할 수 없어. 왜냐면 우리의 마음은 전쟁으로 침략당했거든. 우리가 이기기도 지기도 한 전쟁. 최악의 전쟁. 꿈을 포로로 사로잡고서 다시 그것을 꿈꾸게 하는 전쟁. 정복자를 숭배하고 우리 자신을 경멸하게 만든 전쟁."

p102.
베이비 코참마의 두려움이 눅눅하고 축축한 궐련처럼 차 바닥에 말려 있었다.

p103.
침묵이 물을 듬뿍 머금은 스펀지처럼 차 안을 채웠다. 한물간이란 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부드러운 것을 잘라버렸다. 태양이 진저리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빛났다. 가족은 이게 문제였다. 거만한 의사들처럼 정확하게 어디를 건드리면 아픈지 알았다.

p112.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두려움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파라반의 두려움이라 하더라도.

p113.
쌓인 대팻밥 위에 마침표 두 개처럼 쭈그려 앉아

p127.
도나휴 쇼에 나와 노래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고 말했지만 이제 그것도 빼앗겼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p129.
정적이 보이지 않는 상실처럼 공기 중에 감돌았다.

p153.
그 생각들은 폭풍의 구름처럼 '세면대 도시' 위를 서성였다.

p163.
어떤 것들은 그 자체에 벌이 딸려 있다. 붙박이 옷장이 달린 침실처럼. 곧 그들 모두 그 벌에 관해 알게 될 것이다. 벌이 각기 다른 크기로 온다는 것을. 어떤 벌은 침실의 붙박이 옷장처럼 너무나 크다는 것을. 평생을 그 안에서, 어두운 선반 사이를 헤맬 수도 있다는 것을.

p175.
한때 강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었다. 삶을 바꾸는 힘이. 하지만 이제 강은 이빨이 다 뽑혔고, 기운이 쇠했다. 이젠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들을 바다로 나를 뿐인, 그저 느릿느릿 흘러가는 녹색의 기다란 풀밭이었다. 선명한 비닐봉지들이 하늘을 나는 아열대의 꽃들처럼 끈끈한 잡초로 뒤덮인 수면을 날아갔다.
한때 헤엄을 치러 온 사람들을 물로, '물고기 잡는 사람들'을 물고기에게로 데려다주던 돌계단은, 이제 아무데서 아무데로도 데려다주는 일 없이 완전히 몸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기념물 같았다.

p178.
'공포'는 지난 일이었다. 음식 냄새에 압도당했다. 요리사들의 콧노래에 침묵당했다. 생강과 마늘을 탁탁 써는 경쾌한 소리에. 작은 포유류, 돼지며 염소의 배를 가르는 소리에. 고기 다지는 소리에. 생선 비늘 벗기는 소리에.
무언가 땅 밑에 묻혀 있다. 풀밭 아래. 23년간 내린 6월의 비 아래.
잊힌 작은 것.
세상이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것.
시곗바늘이 그려진 어린아이의 플라스틱 손목시계.
두시 십 분 전.
(중략)
그때 누군가 라헬에게 작은 돌을 던졌고,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 가느다란 두 팔을 마구 흔들면서 달아났다.

p179.
가슴 위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의 겨드랑이가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는 양 꽉 안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겨드랑이를 빌려달라고 하자 막 거절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p191.
라헬의 마음에 내려앉은 나방이 털이 빽빽한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다시 내렸다. 그 작은 다리는 차가웠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조금 덜 사랑했다.

p208.
그녀의 눈은 뿌얘진 보석이었다.

p215.
플리머스는 초록의 한낮 열기를 지나, 차 지붕에 피클 광고판을 이고서, 테일핀에 하늘빛 하늘을 담고서 달려갔다.

p220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무언가가 목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목소리를 잡아채더니 흔들고 털어 웃음기를 빼고 돌려주었다.

p227.
소각로의 철문이 올라가자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의 낮은 웅웅거림이 붉은 포효가 되었다. 열기가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뒤 라헬의 암무는 먹이가 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그녀의 피부,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키플링을 이용해서 애정을 표현하던 방식, 우리는 한 핏줄이다, 너와 나. 그녀의 굿나이트 키스, 한 손으로 그들의 얼굴을 단단히 잡고(뺨은 눌리고 입은 물고기 같아진) 다른 손으로 머리 가르마를 타고 빗질을 해주던 방식. 라헬이 다리를 넣을 수 있도록 속바지를 들고 있던 방식, 왼다리, 오른다리. 이 모든 것이 짐승에게 먹이로 던져졌고 짐승은 흡족해했다.

p230.
으리으리하고 오래된 주택이었지만 아예메넴 저택은 냉담하게 보였다.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눈곱 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이 기뻐 소리지르고 온전히 삶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그저 무상함만을 보는 노인처럼.
(중략)
그 사이로 비껴들어 바닥에 갖가지 무늬를 이루는 햇빛은 비밀로 가득했다. 늑대. 꽃. 이구아나. 태양이 하늘에서 자리를 옮기면서 모습도 바꿨다. 해질녘이면 시간을 어기지 않고 죽어가며.

p232.
눈꼬리가 치켜올라간 선글라스 뒤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눈들은 감겨 있었지만 자신의 바이올린을 떠나 오후 속으로 연기처럼 퍼지는 음악은 볼 수 있었다.

p245.
몸에는 동전만한 햇빛들이 점점이 춤추는 가운데 고무나무 그늘에 서서 딸을 팔에 안은 남자가 고개를 들어 암무와 눈길이 마주쳤다. 수백 년의 시간이 덧없는 한순간으로 응결되었다. 역사는 방심하고 있던 곳에서 허를 찔렸다. 오래된 뱀이 허물 벗듯 벗겨졌다. 오랜 전쟁의 그 흔적, 그 상처, 그 흉터와 뒤로 걷던 나날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그 빈자리에 어떤 독특한 기운이, 감지할 수 있는 빛나는 무언가가 강에서 물을 보듯, 하늘에서 태양을 보듯 분명하게 보였다. 더운 날 열기처럼, 팽팽해진 낚싯줄에서 느껴지는 물고기의 세찬 끌어당김처럼 분명했다. 너무나 명백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p256.
맘마치가 오후에 대고 물었다.

p258.
목숨이 끊어질 때 개미들은 희미하게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엘프요정이 토스트나 바삭한 비스킷을 먹는 것 같았다.

p261.
그날 하루치의 초록이 나무에서 다 배어나왔다. 몬순기의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야자나무 잎들이 축 늘어진 빗처럼 보였다.

p266.
아기천사의 어깨에 머물던 마지막 빛 한줄기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어둠이 정원을 삼켰다. 통째로. 비단뱀처럼. 집안에 불이 켜졌다.

p277.
쌍둥이 사이에 멍처럼 놓인 피클 냄새가 밴 침묵

p288.
매일매일 매달매달 동생이 집을 비우고 아버지가 일하러 간 동안, 쿠타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자신의 젊음이 인사도 없이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을 봤다.

p290.
광기가 고급 레스토랑의 열성적인 웨이터처럼(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물잔을 다시 채워주며) 가까이서 서성거렸다.

p302
밤이 수면 위에 팔꿈치를 기댔고, 별똥별이 물의 부서진 파편을 스쳤다.

p304
"암무, 꿈속에서 행복했다면 그것도 인정돼요?" 에스타가 물었다.
"인정되다니?"
"그 행복이요, 그것도 인정되는 거냐고요?"

p441.
자신들이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었다는, 각자 나름의 확실한 인식으로 세 사람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그것은 신문에 나지 않았다.

p456.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춥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고, 아려오는 욕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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