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10월 7일 ㅣ 날씨: 집 밖에 안 나가서 모르겠음
나는 회사를 멀리 다닌다. 편도로만 두 시간 이상. 아침마다 4호선의 3/4을 지난다. 매일 뜻밖의 여정을 떠나는 호빗이 되는 기분. 지하철을 오래 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 번은 만취한 학생이 가방을 매는데 가방 문이 열려 있어서 가방을 추켜 맬 때마다 내용물이 튀어 나왔다. 이어폰 툭.. 칫솔 툭... 담배 툭... 보조 배터리 툭... . 학생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스크린도어까지 흔적을 남기며 지하철에 올랐다. 사실 이런 일은 일반적인 편이다. 나를 정말 당황스럽게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연휴를 기념해 지하철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1. 모임 참여형
주로 외국인 단체 관광객들에 해당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지하철에 타는 순간부터 웃거나 떠든다. 흘긋흘긋 쳐다보는 시선은 개의치 않는 게 포인트. 그래도 소풍 가는 유치원생들만큼 시끄럽진 않고(얘들은 빼박 대공원역까지 같이 가야 한다) 외국말이라 무슨 얘기 하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쓰이진 않는다. 내 주위에 서기 전까진.
이들은 토론식 학습법에 익숙해서 인지는 몰라도 둥글게 모여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근데 그 둥글게에 가끔 나까지 끼워 넣을 때가 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마저 떠든다. 가끔 내 눈을 보고 웃거나 말하기도 한다. 위아-더월-드, 위아-더프렌-드. 그럼 나는 왠지 얘기에 리액션을 해줘야 할 것 같고 남들 웃을 때 같이 웃어야 할 것 같고 내 의견도 좀 피력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한참 모임을 하다 서울역 쯤에서 우르르 내리면 어쩐지 외롭고 헛헛해지기도 한다.
2. 영역 침범형
나는 4호선 종점에서 지하철을 타기 때문에 원하는 자리에 앉아 갈 수 있다. 그래서 지하철 VIP석으로 통하는 좌석 양 끝자리에 앉곤 한다. 그날도 끝자리에 앉아서 봉에 머리를 기대고 잤다. 한참 가다가 머리에 이상한 압박감이 있어 깼다.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안 들어졌다. 상황파악을 좀 해보니, 한 아저씨가 봉에 기대있는데 봉과 아저씨 엉덩이 사이에 내 머리카락이 끼어 있었다. 더블치즈버거의 빵과 패티 사이에 낀 더블 치즈처럼. 기대 있는 아저씨의 엉덩이와 봉 사이에 머리카락이 기어 들어가진 않았을 거고, 기대있는 내 머리통에 아저씨가 엉덩이를 지긋이 디미신 것 같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빼려 했지만 그랬다간 머리카락이 내 두피에서 빠질 것 같았다. 계속 자는 척을 하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그냥 갈까. 그러기엔 정수리에 느껴지는 푹신함이 너무 개같았다. 나는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착역까지 가는 시간을 위해 잠깐의 굴욕을 참자고 다짐했다. 마음 속으로 '이-얍'을 외치며 머리로 아저씨 엉덩이를 힘껏 밀었다. 아저씨가 잠깐 움찔하는 사이에 머리카락을 구출했다. 다음부턴 봉에 기대서 자지 않는다.
3. 사회분노형
이분들은 시간과 공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 10시 이후에 노약자석에서 만날 수 있고 주로 내가 젊었을 때 이렇게 고생했다, 혹은 요즘 사회가 엉망이다, 아니면 너이씨 꼬라지가 그게 뭐냐 같은 얘기를 한다. 스토리텔링형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들어줄 만하다. 주로 군중을 상대로 얘기하는 편이지만 갑자기 개인 과외를 하려들 때가 있는데 그럼 좀 곤란해진다. 거기서 제일 만만해 보이는 나를 학생으로 찍으면 본격적으로 곤란해진다.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나를 향해 말해서 목을 벅벅 긁으면서 어물어물 대답했다.
- 슬리퍼는.. 슬리퍼는 화장실에서만 신는거야... 밖에 신고 나오는 게 아니야..
- 예.. 근데 이게 슬리퍼가 아니라 쪼린데...
- 대학생이야?
- 졸업을..
- 어디 대학생이야?
- 00대...
- 거기 친일파가 세운 데쟈나.. 친일... (졸음) 췬일파!!... 이 개애섀끼들... (무슨 얘기 하던 중인지 생각) 우리나라가 전쟁 끝나고 친일파 대가리들을 안 쳐내서 그 새끼들이 다 해쳐먹었잖아... 그래 안그래...
- 예 근데 제가 친일을 한 게 아니라..
- 빨갱이란 말이 왜 생긴지 알아? (침 흘림) 빨갱이라는 말이 어디서 생긴 줄 아냐고... 거거는.. (졸음)
이쯤 되니 객실 안 사람들 모두 나의 탈출을 염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응원에 힘입어 아저씨가 조는 사이에 냅다 다른 칸으로 튀었다. 한숨 돌리는데 목이 너무 아파서 거울을 보니 목을 하도 빡빡 긁어서 벌게져 있었다. 당황하면 목 긁는 습관부터 고쳐야겠다.
이 외에도 참 많은 분들이 있었다. 부탁드리고 싶은건, 욕이나 고성, 춤사위 및 기타 주정은 내 옆에서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걸 못 본 척 할 만큼 야멸차지도 않고, 제지할 만큼 실천적이지도 않고 그저 내 목만 죽어날 뿐이다. 2m 정도만 떨어져 주셔도 긴 통근 길에 좋은 구경거리라 생각하고 잘 감상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