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10월 22일 ㅣ 날씨: 춥던지 덥던지 한 가지만 했으면
지난주에 우리팀이 급 제안서를 쓰게 됐다.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제안서 제출이 다음주 월요일까지였다. 팀장님은 '수요일 제안서 방향 잡기-목요일 와꾸 잡기-금요일 작성'이라는 자진모리장단처럼 휘몰아치는 계획을 세웠고 내겐 그저 '수요일 야근-목요일 존나 야근-금요일 씹존나 야근'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근데 우리 할머니가 기도도 많이 하시고 생전에 덕이 많으셔서 그런지, 수요일에 회사 점검을 해야 한다고 여덟시부터 정전이라고 했다. 나는 이것 참 유감이네요 하는 표정을 지었고 팀장님은 해답을 내놓았다. "치킨 집 가서 회의하자"
저 말은 '하기 싫은데 해야 하니까 하는 척만 하고 하지 말자'는 완곡한 표현임을 알았다. 대학생 때 막걸리 집 가서 과제하자는 애들이 딱 저런 유형이었다. 대학교에서 만났으면 상종도 안 했을 것을. 하지만 나는 팀장님 말이면 무조건 따른다는 의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 치킨 먹고 일찍 집에 가겠구나.'
우리는 나름대로 가장 밝은 치킨집에 들어갔다. 회의를 하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제안요청서를 꺼내 놨는데 그냥 흰 식탁보 같았다. 외근 나갔던 대리님도 도착하고 이제 얘기를 좀 해볼까 하는데 치킨이 나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렇듯 치킨을 먹으면 '맛있다' '내가 다리 먹어도 되나'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다. 아마 인체학적으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팀장님이 뭐라뭐라 할 때 열심히 끄덕거렸지만 사실 치킨이 맛있다는 스스로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생 때 우리 과는 유난히 팀플이 많았다. 그래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새벽 2시 쯤 되면 모든 아이디어에 동의하는 증상이 발생한다. 아무튼 다 좋고 완벽하니까 씨발 이제 좀 끝내자 같은 마음이 되는 건데, 우리는 이걸 팀플 요정이 왔다고 표현했다. 아마 그날도 요정님이 다녀가신 것 같았다. 만약 회의록을 썼다면 응 맞아, 쩝쩝, 다 좋아, 치킨 맛있다, 쩝쩝, 그래 그걸로 하자 같은 내용이었을 거다.
우리의 기름지고 바삭한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그 후 일정을 간략히 설명하면, 2차로 곱창집에 가서 바깥 테이블에서 먹다가 너무 추워서 덜덜 떨면서 투썸플레이스 가서 커피 마시고 집에 갔다. 다음날 가방 열어보니까 투썸 진동벨이 들어있더라. 팀장님이 수비니어라고 가져가라고 챙겨주신 게 떠올랐다. 후배로서 책임지고 팀장님의 시민의식을 고양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점심시간에 종로에 가서 돌려주고 왔다. 팀장님이 "돌려주고 왔어? 뭐래?" 하고 묻는데 팀장님의 손목을 돌려버리면 되는 건가 싶었다.
+ 제안서는 잘 끝냈다. 역시 제안서는 술빨로 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