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11월 4일 토요일 ㅣ 날씨: 가을 보신 분?
우리 회사는 소수의 인원이 아등바등 일 해서 굴러가는 곳이라 사무실에 사람이 없고 쾌적하다는 장점이 있다. 책상도 넓고 자리도 띄엄띄엄 해서 야근할 때 졸라 무섭기에 제격이다. 물론 사람이 많으나 적으나 야근은 무서운 것이다. 아무튼 나는 사무실을 참 좋아하는데 몆 개월 다니다 보니 사무실에 있는 물건들 중에 꽤 흥미로운 특징을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끔은 이 특징 때문에 물건이 사람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커피머신이 살아있다-
커피믹스나 덜렁 갖다 놓는 후진적인 탕비실과 달리 우리 회사에는 캡슐 커피머신이 있다. 맨날 나가는 커피값도 만만치 않아서 저 커피머신을 언제 한 번 꼭 쓰리라, 하고 벼르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그냥 쓰면 되지 뭘 벼르기까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데, 몇 번 말했듯이 나는 매우 소심하다. 팀장님이 서류 봉투 붙여서 퀵으로 보내라고 하면 봉투를 딱풀로 붙일까 물풀로 붙일까 고민하다가 결국 테이프로 붙이고 아 그냥 풀로 붙일걸 생각하는 탑클래스 소심이다. 그래서 혹시 쓸 줄도 모르는 커피머신을 잘못 썼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끌면 어쩌지 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마 없는 직원이 더 없던 어느 오후, 바로 이 시점에 커피머신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깨너머로 배운 대로 조심스럽게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눌렀는데...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악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와아... 나는 진짜 놀라서 두 손으로 커피머신을 붙잡고 우는 애한테 그러듯이 "쵸용히해애 쵸횽히하라고"하고 속삭였다. 근데 이 커피병신, 아니 머신이 곧 멈출 듯이 심약한 병자처럼 쿠훌럭 거리다가 다시 "그아아아ㅏㅏㅏㅏㅏ아아아아아이ㅏ악ㄱㄱㄱㄱ"하고 또 한 바탕 쏟아내는 거였다. 야이씨...
부들거리면서 커피를 들고 막 눈치를 보는데 아무도 신경 안 쓰더라. 역시 나 혼자 소심해서 그러는 거였다.
-복합기가 살아있다-
복합기는 이름부터 어딘가 대충이다. 인쇄도 되고 복사도 되고 스캔도 되고 그냥 다 복합적으로 돼서 복합기라는 건데 그 논리에 따르면 냉장도 되고 냉동도 되는 냉장고도 복합기고 물도 나오고 얼음도 나오는 정수기도 복합기고 먹기도 하고 싸기도 하는 나도 복합기겠다.
아무튼 복합기한테 화가 난 건 아니고, 복합기라는 이름을 붙인 누군가의 쿨함에 잠시 어찔해졌을 뿐이다. 사실 나는 복합기한테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다. 내가 입사할 때부터 꾸준히 '잉크가 부족합니다'라고 했는데 3개월 째 존나 잘 뽑히고 있기 때문이다. 몇십 장 짜리 제안서를 컬러로 막 몇 부씩 뽑아대는 데도 어느 잉크가 부족한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선명하게 나온다. 복합기의 살신성인을 보고 있자면 마치, 없다 없다 하면서도 자식새끼가 보채면 학원비고 용돈이고 다 내어주는 우리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이 든 후부터는 잉크 부족 메시지를 볼 때마다 좌심방이 약간 애려오는 것 같다.
-엑셀이 살아있다-
엑셀. 직장인에겐 영혼의 단짝쿵짝쿵작짝 같은 존재. 분명 몇백 명 분의 데이터를 일일이 분류하던 직장인이 '시발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일일이 하면 좆 같은 것들 리스트'를 만들어 그 모든 기능을 반영해 만든 게 엑셀일 것이다. 그런 기능 중 하나가 자동완성이다. 대부분의 경우 주인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기특한 녀석인데 가끔 손발 안맞는 후배처럼 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 아 '실용서적'이라고 쳐야지. '실...'
- 주인님!! '실내비품'을 치려고 하시는 군요?!!
- 응? 아니야 그거 아니야
- 아 주인님!!! '실수익'이죠? 맞죠??!
- 아니 가만히 있어봐 실용...
- 아!!! 완전히 알았어요!!!! '실용학문'이구나!!!!! 네?!!! 이거죠??!!!?!
- 아니 병신아 그냥 내가 다 칠게
같은 경우다. 후배가 이러면 되게 짜증나겠다 생각하다 문득 대리님이 왜 항상 짜증나 있는지 알게 돼 버렸다.
-정수기가 살아있다-
군대에는 짬타이거라는 게 있다. 부대에 어슬렁 거린 세월이 오래 돼 어느덧 웬만한 일병보다 짬이 높은 고양이를 그렇게 부른다. 우리 사무실에도 짬타이거 같은 존재가 있는데 바로 얼음 정수기다. 나보다 사무실에도 오래 있었고 심지어 나보다 일도 잘한다. 짬정수기님이 얼음을 만드시느라 가끔 까드득까드득하는 소리를 내시는데 '내가 너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 이 신입 나부랭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종종 혼자 시무룩해지곤 한다.
얼음 정수기는 가끔 무료하다 싶으면 뜨거운 물 나올 곳에서 찬물을 내보낸다. 찬물 부은 컵라면을 망연히 들고 있자면 정수기가 짬찌인 나를 농락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정수기가 왜 또 이러지 하면서 이것저것 누르다 보면 기계주제에 인간이 저 하나 때문에 쩔쩔매는 걸 즐기고 있다는 망상이 든다. 역시 인공지능의 시대는 도래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