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ㅣ 날씨: 국민 유니폼 롱패딩 장착
우리 팀은 어느 기관의 sns 채널에 올라갈 콘텐츠를 만든다. 나랑 대리님이랑 일주일에 8개 정도 만드는데 공장제 가내수공업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 손으로 만들지만 기계가 찍어낸 것 같은 천편일률적이고 개성 없는 내용을 자랑한다.
원래 일정대로면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콘텐츠를 만들어서 목요일에 클라이언트한테 컨펌을 받는다. 근데 이번 주엔 제안서 쓰느라 월요일, 화요일에 하나도 못 만들었다. 화요일 여섯 시, 퇴근하려는 나를 붙잡고 대리님이 "콘텐츠는 언제 만들 것인가"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대로 집에 가면 다음 날 하루만에 콘텐츠 4개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이쿠 그쵸 만들고 가야겠다"하고 후딱 다시 앉으면 왠지 무계획하고 무능력해 보일 것 같아서, "내일"이라고 답하고 바람처럼 떠났다. 내가 생각해도 존나 멋졌다.
-다음 날- 만약 할 일이 머리 위에 게이지로 표시된다면, 그날 내 일 게이지는 수르트 대가리처럼 펑펑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게도 콘텐츠를 1도 못 만들고 6시가 되었다. 내가 콘텐츠 하나를 만들려면 최소 3시간이 걸리는데 그럼 난 12시간 후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야호! 좆됐닿! 나는 '집에가서 밤을 새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리님의 표정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처럼 지엄하기 짝이 없었다. 콘텐츠를 다 만들기 전까지 나를 회사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날 정말 뒤주에 갇힌 듯 뒤지게 포토샵을 했던 기억이다.
그렇게 대리님과 야근어택이 시작됐다. 대리님은 "후배를 사무실에 홀로 두고갈 수 없다"며 옆에서 날 기다리며 피파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페북에서 '싸이코패스 테스트 4점 만점에 3.5점 나왔다'면서 알로에 화분에 알로에 주스 부어주는 새끼를 본 적이 있는데 대리님을 보는 기분이 그 때와 약간 비슷했다. 정말 날 위해 저러는 걸까... 역지사지가 정말 요만큼도 안 되는 건가.....
나는 대리님을 집에 보내야겠다는 집념으로 거의 울면서 포토샵을 했다. 사실 포토샵이라는 게 개체를 여기 뒀다가 저기 뒀다가 원래 자리가 낫겠네 했다가 이 색도 썼다가 저 색도 썼다가 명조체도 썼다가 나눔 스퀘어도 썼다가 역시 윤고딕이지 하는 과정인데, 시간이 없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마우스로 맨 처음 놓은 자리가 그 개체의 자리고, 색상환에서 제일 처음 찍은 색이 배경색이 됐다. 폰트는 무조건 배달의 민족 도현체. 하다보니 이런 느낌이 낯설지 않았는데, 대학생 때 과제할 때도 이런 식이었다. 교수가 허용하는 가장 저퀄리티로. 한 번 쓴 문장은 절대 지우지 않고 끝낸 페이지는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아 역시 인간은 고쳐 쓸 수 없어.
포토샵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한 시간에 콘텐츠를 하나씩 뽑아내다 보면 잡념이 없어진다. 내가 템플스테이 가서 108배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불경스럽지만 레알이다. 부처를 넘어선 그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 12시 컷으로 포토샵을 끝내고 역으로 대리님이 피파 다할 때까지 기다렸다. 집에 가면서 피파가 개새낀지 대리님이 개새낀지 곰곰이 생각했다.
+동생한테 글을 보여줬다.
- 이걸 올리겠다고?
- 응!
- 이야 흥미진진한데?
- 정말?
- 응 니가 짤릴 것 같아서 흥미진진해.
여차하면 블로그를 폭파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계정 삭제 방법을 익혀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