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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피파가 싫어요

by 빵떡씨

날짜: 2017년 11월 26일 토요일 ㅣ 날씨: 비. 너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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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회사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평소엔 과묵하고 입을 열면 어눌한, 홍보대행사에서 절대 뽑아선 안됐을 신입 캐릭터를 적립해가는 중이다. 내 과묵함이 돋보이는 때는 단연 점심시간이다.
"손흥민 골 넣었더라?" "아 그죠"로 시작되는 팀장님과 대리님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음" "으음" 하면서 생후 7개월된 아기 이유식 음미하는 소리만 낸다. 그러다 화두가 EPL(영국 프리미어 리그)까지 넘어가면 나는 꽤나 무료해져서 추임새를 넣는 것도 관두고 가까운 테이블에서 하는 얘기를 들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곤 한다.
할 말이 생겨도 '이 화두를 굳이? 지금? 꺼내야 하는가'를 꽤 오랫동안 생각하다 영영 말하지 않을 때가 많다. 주인의 사회성 저하를 우려하는 내 에고가 '그래! 지금 생각난 거 그거! 말해 병신아!'라고 떠밀 때에야 오래 말을 안 해 꽉 잠긴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하곤 한다. 그렇게 말해도 반응은 'ㅎㅎ' 정도였기 때문에 에고까지 나서서 용기를 낼 필요가 없던 날들이었습니다.

나는 씹노잼이며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적응해가던 어느날, 대리님은 외근으로 팀장님은 숙취로 같이 점심을 못 먹게 됐다. 나는 옆팀에 껴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옆팀은 팀원이 다섯 명이고 모두 여자다. 점심으론 매운 치즈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매운 떡볶이. 위에 치즈. 입사 이래로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점심 매뉴였다. 떡볶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팀원들의 표정은 마치 그 옛날 캔모아에서 과일빙수를 기다리는 여중생의 그것과 같았다. 그녀들은 캔모아 시절의 설레는 눈동자를 하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 대리님 네일 예쁘게 됐다, 그거 뭐에요? 젤이에요?
- 아 이거 친구가 해준거야. 아모레에서 브이아이피 선물로 네일 키트 받았던 거로 해줬어 ㅎㅎ
- 진짜요? 너무 예뻐요오~
- 요즘에는 손톱 굽는 그 기계 없어도 이만큼 할 수 있을껄?
- 맞아요 요즘 매니큐어가 잘 나오니까.
- 내가 어제 올리브영에서 산 거 있는데 그거 브랜드 알려줄게.
- 오 네네 좋아요 >.<

네일... 젤...... 아모레.... 올리브영....
얼굴도 모르는 손흥민과 좆 같은 프리미어 리그 얘기만 듣던 내게 그녀들의 대화는 촉촉한 단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국에 돌아온 유랑민의 심정이 되어 신나게 같이 떠들었다. 떡볶이를 조진 다음엔 회사 뒤에 있는 카페에 가서 바나나 블루베리 쉐이크와 초코 케이크를 먹었다.
꾸덕한 초코 케이크를 한 입 왕 베어물며 생각했다. 그래 내 사회성은 온전하다. 그저 누구라도 점심시간 내내 개 같은 피파와 좆 같은 에펨코리아 얘기만 듣다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 팀원들은 때려치고 여성 동지들과 함께해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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