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7년 12월 14일 일요일 | 날씨: 겨울 이 X발 X끼야
나는 무서워 하는 사람이 많다. 고등학생 때 선생님... 알바 같이 했던 언니... 홍보학개론 교수님... 미용실 언니들... 그리고... 디자이너... . 디자이너를 무서워하는 건 일종의 경외감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자연의 어마어마한 능력과 이해불가함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나도 디자이너의 어마어마한 능력과 이해불가함에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다.
전에 인턴을 하던 곳에도 디자이너가 있었다. 말이 없고.. 밥은 일 하면서 먹고... 늦게 퇴근 하고.. 주로 피곤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누끼를 따고... 그런 인고의 세월과 끈기 있는 엉덩이로 결국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실로 다른 종자의 사람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분에게 아이디어를 전할 때 주로 졸라맨을 그려서 "이.. 사람을 이렇게.. 이 모양으로..." "춤 추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다리 꼬고 있는 건데..." "아..." 같은 가이드를 드렸기 때문에 내 기획이 반영되면서도 절대 내 머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결과물을 받으면 실로 감동을 받곤 했다. 저분의 손과 내 팔 끝에 달려있는 것은 과연 같은 신체기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다섯 갈래로 갈라진 살덩어리로 눈물을 훔치곤 했다.
우리 회사에도 디자이너가 있다. 안경을 쓰고 초록 니트를 입고 노인처럼 사무실을 어슬렁거린다. 그냥 노인이 아니라 방망이 깍는 노인 같은 건데 어떤 썩은 가이드를 가져가도 매끌매끌한 방망이처럼 잘 다듬어 놓는다. 내가 우와우와 하고 있으면 "너도 배우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마치 야오밍이 "너도 우유 먹으면 더 클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현실성이 없다.
처음엔 그런 경외심에 경계를 했지만 왠지 우리 회사 디자이너님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띠 하나를 넘는 나이 차이에도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었다. 나와 다른 손을 가졌지만 그래도 많은 잡담과 장난을 나누며 완전히 다른 종족은 아니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인포그래픽 작업을 할 게 있어서 처음으로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 제가 보정할 사진 보낸 거 보셨어요?
- 아 봤는데 사진을 주기 전에 어떤 톤으로 할 건지, 컨셉이 뭔지 그런 거를 레퍼랑 같이 줘야지.
- ? (뭐?)
- ? (뭐)
- 음 ... 톤이요? 렙? 레퍼?
- 그래애 톤~ 레퍼런스~
- ? (순수하게 멍청한 눈빛)
- ... 그러니까 분위기나 그런 걸 어떻게 할지 참고할 사진을 몇 개 달라고
- 아 분위기~
- 으응
- ...? (그건 님이 하실 일 아닌가요)
- .. (응 아니야)
- 으흠~ 아~ 그러니까... 저는 분위기가 좀 이륵께 샤아아 하고 막 파스텔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필터 쓴 것 같이 쌰아아아(강조)한 그런거 뭔지 아시죠?
- ...
- 아니 왜 있잖아요 그 너무 째애앵 하지 않으면서 소ㅑ~한 그런거. 약간 뿌연 느낌인데 뿌옇지는 않고 그..
- (얘를 왜 뽑은 걸까)
- 아하이 참 그런 거 모르세요?(도발용) 요즘 인스타에 많은 그런 거 있잖아요 아이 모르시네에 트렌드를 모르셔
- 자 하(한숨) 그런걸 말로 하기가 어려우니까 사진을 찾아서 주시라고요
- 음~ 사지인~? (찾기 싫다)
- 응~ 사지인~ (찾아)
노련한 방망이 깎는 노인은 노련(하지만 거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솜씨로 나를 돌려보냈다. 나는 참 한 때라도 디자이너와 내가 한 종족이라고 생각했던 게 멍청하게 느껴졌다. 디자이너는 손만 다른 게 아니라 쓰는 언어도 달랐다.
+ 후에 디자이너 친구와 이 얘기를 했는데 위와 같은 커뮤니케이션이 디자이너가 가장 싫어하는 주문 방법이라고 했다. 다들 나를 타산지석 삼아 디자이너와 좋은 대화 나누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