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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외의 좋은 결말

by 빵떡씨

날짜: 2018년 2월 4일 일요일 | 날씨: 발목 절단하고 싶으신 분 7부 바지와 발목양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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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팀은 올해부터 새로운 기업의 블로그를 운영한다. 나는 개인 블로그를 5년 째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블로그에서만은 프라우드랄까 자신감이랄까 그 어떤 맡겨만 주시라하는 뿌듯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대리님을 오늘 유치원에서 배운 내용을 설명하는 6세 아이 보듯 인자하게 바라볼 정도였다.

하지만 일로써 하는 블로그는 취미로 하는 블로그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일의 포인트는 효율성이다. 집에서 유튜브 겜방 들으면서 엎드려 쓰다 앉아 쓰다 누워 쓰다 결국 잠들어 다음 날 쓰는 블로그에는 전혀 없는 포인트다. 3일에 하나가 아니라 하루에 세 개를 쓰려면 손 끝에서 문장을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옛 장인들이 일필휘지로 쓴 것도 자본주의의 효율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자기 만드는 데 비유하자면 물레를 돌돌 돌려 그릇을 곱게 빚는 게 아니라 주먹으로 흙덩어리 중앙을 쾅 치곤 움푹 들어갔으니 그릇이라며 팔아먹는 식이다.


그리고 클라이언트의 취향. 윗윗윗선에 계실 어느 분의 취향이 보이지 않는 손처럼 기업의 모세혈관까지 장악해 미천한 대행사 사원이 쓰는 문장 하나하나에도 영향력을 미친다. 부정적인 뉘앙스만 있어도 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거의 문장 형성이 안 되는 상태가 됐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글 쓰기 전 잠시 자아를 빼놓는 것이었다. 대행사 다닐 거면 자아 정도는 탈부착 후드보다 쉽게 떼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럼 모든 일이 간편해 지는데 '한 입 베어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이 일품...', '연인과 데이트 코스로 제격...', '신랑님과 아이들도 넘나 좋아할 맛집 5선...' 같은 문장을 아무 수치심 없이 탈칵탈칵 쳐 넣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산업혁명 시절 노동자처럼 눈 뜨면 일 나가서 10시간 정도 거하게 일하고 '오늘도 살아냈구만'하고 뿌듯하게 잠 들고 다시 일 나가는 루틴을 반복 중이기 때문에 실상 자아가 내 안에 있는 경우는 얼마 없다. 그러다보니 자아가 볕에 내놓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간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는데 안 그래도 풍성치 못한 자아가 더 훼손된다면 자낳괴가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아서 앞으로 돈 안 받고 자발적으로 하는 유일한 소일거리인 개인 블로그를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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