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 날씨: 오이도 바닷바람이 귀때기를 철썩
나는 우리 팀장님을 참 좋아한다. 일기에서 몇 번 욕을 하긴 했지만 사람이란 게 모든 면이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왠지 팀장이라는 직급은 '숨을 왜저렇게 쉬냐'는 이유만으로도 욕을 하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진실로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내가 팀장님의 매력에 얼마나 빠졌느냐 하면 팀장님이 숙취 때문에 11시에 출근해서 20분 일하고 지 차에서 점심 시간 내 자는 꼴을 보고도 어느새 팀장님 맥일 헛개차를 사고 있을 정도다. 물론 사다 줘봤자 요만큼도 안 고마워 하기 때문에 1500원 어치 보람도 없다.
그러니까 욕을 하자는 게 아닌데 자꾸 욕으로 흘러가는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팀장이란 직급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열심히 팀장님 덕질 중이어서 낮잠 자는 사진도 찍어 놓는다. 한 번은 팀장님이 내 사진첩을 보더니 날 고소하겠다고 했을 정도다. 요즘은 고소당하기 싫어서 먼 발치에서 팀장님을 관찰하는데 소개하고 싶은 팀장님의 특이점이 있어 써보았다.
#빨간가방
우리 팀장님은 외모가 나이스한 편이다. 옷도 곧 잘 입고 머리도 야무지게 만지고 온다. 근데 사람이란 참 아이러니한 게, 나이스한 외모에 옷을 곧 잘 입고 머리를 야무지게 매만지고 거기에 빨간 가방을 맨다. 백팩이나 크로스백이 아니고 어깨에 살포시 얹는 핸드백이다. 차라리 옷을 병신처럼 입으면 일관성이라도 있지. 나는 진짜 누가 매는 가방까지 신경 쓰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정말 신경이 너무너무 쓰인다.
왜 그 가방을 매는지 물어봐도 안 알려준다. 가방에 뭐 들었냐고 물어도 "아이코스랑 지갑"이라고 해서 그럼 그냥 주머니에 넣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만 증폭되는 날들이었다. 정말 너무너무 궁금해서 혼자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혹시 어머니께서 생전에 매시던 가방일까... 근데 어머니 건강하게 잘 살아계신데.... 혹시 아내 분과의 애틋한 추억이 담겨있는 걸까.. 근데 아내 분도 가방 개빡쳐 하시던데... 정도 되면 그냥 생각하기를 그만둬 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나랑 대리님이랑 그 가방 좀 매지 말라고 했더니 자꾸 그러면 목욕 바구니 매고 다닌다고 해서 이제 그냥 아무 소리도 안 한다.
#담배
우리 팀장님은 냄새 폴폴 나는 담배 같은 거 피지 않는다. 요즘 흡연 트렌드는 아이코스다. 이게 불을 붙이는 게 아니라 쪄서 담배를 피우는 건데 냄새도 안 나고 몸에도 덜 해롭고... 안 피면 아예 안 해로울 텐데.. 아무튼 요지는 팀장님이 아이코스를 굉장히 사랑한다는 거다. 근데 동시에 굉장히 게을러서 항상 갈등의 기로에 서곤 한다.
담배는 피고 싶은데 그럼 1층 까지 내려가야 하는데 팀장님에게 1층과 3층은 세상의 끝과 끝 같아서 피러 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는 것이다. "대리야 담배 피고 싶다" "피세요" "근데 가기가 너무 귀찮아" "그럼 피지 마세요" "근데 피고 싶어" 같은 대화를 누구 하나 지칠 때까지 이어가다가 결국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에 입을 대고 담배 피는 시늉을 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옆팀 팀장님의 손에 이끌려 1층으로 내려가곤 한다.
하루는 야근을 하는데 또 팀장님이 가습기 연기를 아련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리야 나 화장실에서 담배 피면 안 되겠지?"
"안되죠 건물 내 금연인데"
"대표님 방에서 피는 건 어때?"
"뭐 그건... 괜찮겠네요"
나는 하하 웃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구나 했다. 근데 팀장님이 주섬주섬 아이코스를 챙기더니 대표님 방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방이 유리로 돼있어서 밖에서도 잘 보이는데 그래서 팀장님이 담배 피는 것도 아주 잘 보이더라.
다들 너무 자연스럽길래 나는 순간적으로 '대표님 방은 흡연 가능한 곳인가' 생각 하다가 퍼뜩 그럴리가 없다는 걸 떠올렸다. 팀장님은 대표님 방에서 느긋하게 흡연을 마치고 '교무실에서 담배 피고 나오는 것 같은 스릴'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그러고는 "양아치다! 나는 양아치다!!"라고 만세삼창하듯 외치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왔다. 어우 미친놈....
#솜잠바
내 롱패딩은 솜이다.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 업고 다니는 듯한 무게감과 솜 과밀화로 인한 알통몬 핏이 특징이다. 그래도 나는 솜패딩을 입는데 전혀 불만이 없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팀장님이 놀리기 전까지는...
"빵떡아 요즘 누가 솜잠바 입니 6.25 때 쓰고 남은 군사용품이니?" "빵떡아 너 그 얘기 아니? 당나귀가 솜을 지고 가다가 물에 젖으니까 무거워서 걷지를 못했다는구나. 너도 비오면 그렇게 되는 거니?" "빵떡아 그거 알통이니? 아 솜이구나^^" 내가 가난한 사람 놀리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주의를 줘도 끝없이 놀리곤 했다. 아예 내 패딩은 패딩 축에도 못 끼고 고유명사처럼 솜잠바로 불렸고 입으면 안될 옷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소문이 났다.
어느날 클라이언트랑 저녁을 먹는데 진짜 돌았는지 거기서까지 솜잠바 얘길 꺼내더라. 나는 정말 집에 가자마자 노동부 번호를 검색해서 내일 해뜨자마자 모욕죄로 민원을 넣고 싶은 마음이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다들 클라이언트가 짓는 측은한 표정을 봤어야 했다. 모포를 두르고 다녀도 그만큼 불쌍하게 보진 않았을 거다.
며칠 뒤에 그 클라이언트랑 다시 만났는데 뭘 한 보따리 싸와서 나한테 내밀었다. 꺼내보니까 '오리털' 롱패딩이었다. 비싼 건 아니니 편하게 입으라고 주더라. 요즘 그 롱패딩 굉장히 잘 입고 다닌다. 나는 이제 팀장님이 내 모든 옷 하나하나를 다 놀림거리로 삼아주면 좋겠고 특히 클라이언트 앞에서 찰지게 놀려주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