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3월 18일 일요일 | 날씨: 탈피 시즌으로 변태가 더딘 롱패딩라미와 일찍 허물을 벗은 청자켓불이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나는 매콤하고 감칠맛 나는 비냉을 좋아하는데 입사 후 세 달간은 냉면집에 가면 물냉만 먹었다. 회냉면이고 칡냉면이고 다 있어도 고르는 척만 하다 결국 물냉이었다. 이유는 비냉 먹다가 이에 고춧가루 낄까봐. 고춧가루 끼면 사람들 앞에서 거울 보고 이~ 해야 한다. 그런 역동적인 표정은 소심한 내게 너무나 큰 챌린지... . 이런 얘길 하면 지인들은 어우.. 그정도니...? 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아무리 안타까워도 본인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세월은 참 빠르게 흘러 어느덧 나는 8개월 차 사원이다. 사회성도 그런대로 무르익어 원래 오백 가지 정도 부끄러워 했다면 이제 사백팔십 가지 정도만 부끄러워 하는 진일보한 직장인이 됐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자랑하는 일기.
한때 전화선을 몰래 뽑아놓을까 하는 앙큼한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다. 그정도로 전화가 무서웠다. 을의 통화란 괜찮으실까요와 되실까요, 하실까요, 없으실까요, 가능하실까요, 계실까요, 보실까요 '실까요' 씨족사회 구성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노님 나오시는 수준의 격식차리기를 마치면 이곳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온 회사 사람들이 내 전화에 귀 기울고 있다는 생각도 두려움에 한 몫 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자의식 과잉이란 걸 깨달았고 그 후부턴 어느 정도 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통화도 가능하다.
- 안녕하세요, 블로거 딸ki둥2님 맞으시죠? 지금 통화되실까요?^^
- (굵직) 예
- 아 저희가 이번에 제품을 런칭했는데 혹시 딸ki둥2님 블로그에 리뷰 가능하실까요?^^
- 뭔데요?
- 저희 이번에 엔젤 탱글 브러쉬를 런칭해서 랄라블라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딸ki둥2님 블로그와 제품 컨셉이 잘 맞아 보여서 연락드렸는데 괜찮으실까요?^^
- 예 뭐 하죠 뭐
- 감사합니다 딸ki둥2님~ 엔젤 탱글 브러쉬 곧 댁으로 가실 겁니다^^
통화를 마치면 에뛰드 하우스에서 공주님 어서오세요를 듣던 시절처럼 얼굴이 딸ki색으로 물든다. 그래도 이 얼마나 눈부신 발전인가.
내가 또 하나 못 하는 건 맞장구 치기. 이 정도면 입으로는 처먹는 것 밖에 달리 잘 하는 게 없는 듯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맞장구란 좋은 얘기일 때-오... 안 좋은 얘기일 때-흠... 정도. 아마 나는 단두대에 목을 내놓고도 흠... 하다 뒈질 게 분명하다.
회사에선 맞장구가 생각보다 중요하다. 특히 하소연을 잘 받아줘야 한다. 너두? 야 나두! 같은 느낌으로 쌍방투덜이 이뤄져야 투덜대는 흥이 올라 스트레스가 조금이나마 해소된다. 하지만 기저에 -그래서 어쩌라고-의 심리가 깔리면 어떤 투덜거림을 들어도 그저 유감이네요.. 정도의 내색만 하게 됩니다.
내가 맞장구를 배운 건 한 달 전부터다. 다른 팀이었던 사원님 한 명과 대리님 한 명 우리 팀에 합류했는데, 그녀들의 맞장구란 보고 있자면 맞장구 무형문화재로 등록하고 싶은 보존욕구가 생길 만한 것이다. 그녀들을 보고 배운 맞장구 메뉴얼이 있어 공유해본다.
1. 일단 "진짜"라고 해라
예시1) 와 금요일 다섯 시에 이거 하라는 게 말이 돼?
진짜 어이없네요!
예시2) 아 일 왜이렇게 많아? 야근 각인데?
진짜진짜? 저두요~
예시3) 오늘 너무 피곤하다...
진~짜 그러시겠다 TT
2. 에이 00이라뇨~
이건 난감한 농담을 받았을 때 표정을 구기다가 아차 싶어서 어색하게 웃는 걸 방지해 주는 멘트다. 뭐든 저 00에 넣으면 된다. 레알 만능.
예시1) 빵떡아 남자친구는 언제 사귈 거니
에이 남자친구라뇨~ 사귈 시간이 없는데^^
예시2) 빵떡이 살 찐거 같은데?
에이 살쪘다뇨~ 야근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예시3) 오늘은 빵떡이가 쏘는 건가?
에이 쏘다뇨~ 제 월급 아시면서^^
3. 이 외 관용구
- 솔직히 그건 아무도 못해요 = 상사가 일을 못 해서 까였다
- 와 저였으면 진짜... = 상사가 화를 잘 참았다
- 그 사람 왜 그러는 거래요? = 클라이언트가 무리한 요구를 했다
- 미친 거 아니에요? = 클라이언트가 많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
사실 저것들도 버거울 때가 있어 그냥 맞장구 모드를 ON/OFF 하고 있다. 평소엔 시무룩하게 있다가 머리속에 ON 스위치가 켜지면 어머어머.. 어떡해요! 미친 거 아니에요? 진짜 힘드셨겠다.. 아니 그사람 진짜 이해가 안 되네에 저였으면 완전 못 참았을 텐데...! 진짜 잘 하셨어요~ 솔직히 대리님 정도 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