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4월 5일 목요일 | 날씨: 을씨년 절씨년
오이도역 계단을 내려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그가 보인다. 퇴근한 날 데리러 온 쏘 스윗한 그. 내 동생. 나랑 내 동생은 쌍둥이다. 제왕절개로 의사가 꺼내고 싶은 놈 먼저 꺼냈다. 역시 손윗사람은 여식이 좋지라는 결론에서였는지 내 두상이 그립감이 더 나아 보여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선택이 두 사람의 평생을 가를 중한 복불복이었다는 것만은 팩트다.
우리 부모님은 나름대로 누나 동생 서열을 엄격히 함으로써 자식들이 정체성에 큰 혼란 없이 자라게 하려 애쓰셨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누가 위고 아랜지 몰랐어도 그런대로 어물어물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실상 우리를 엇나가게 한건 실체 없는 서열에서 오는 권력과 복종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누나란 것을 공고히 하기 위해 요구르트도 누나 먼저, 계란후라이도 누나 먼저 그저 좋은 것은 누나부터 주곤 했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근성 같은 것을 생기게 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보살핌 받고 동생에게 우대 받아야 한다는 공주 근성을, 동생은 나를 떠받들고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시중 근성을 갖게 됐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듯 나는 부모님이 쥐어준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대로 물밑 작업을 시도했다. 예컨데 놀이터에서 동생이 시소 가까이에 서있던 적이 있다. 나는 같이 타자고 맞은편 자리에 풀썩 앉았다. 내 체중은 시소를 기울이는 운동에너지로 변환되었고 시소는 그에 상응하는 힘으로 동생의 턱주가리를 가격했다. 지금도 동생 하관이 전현무 유두처럼 툭 튀어나왔는데 혹시 이때의 일 때문이 아닌지 남몰래 생각하곤 한다.
아무튼 보통의 어린이들은 이럴 때 빼액 우는 동생을 두고 튀던지 미안하다며 빌던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침착하게 다가가 '왜 거기 서있어서 시소에 맞느냐'는 논점 흐리기와 '그래도 내가 같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는 다정하고 다감한 멘트로 가해자에서 벗어나 조력자로 탈바꿈했다. 지금보다 그때의 내가 훨씬 더 영악하고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동생은 뭔진 모르겠고 누군가 자신의 턱을 탑블레이드 팽이삼아 고우 슛!! 하고 돌려버리는 듯한 고통에 내가 이끄는 대로 집에 끌려 왔다. 나는 믿음직한 누나로서 엄마에게 이 자초지종을 각색해 조곤조곤 설명했고 엄마는 조심성 없는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대체로 그 나이에 걸맞는 악랄함을 견지하던 시절이었다.
크면서 동생이 힘도 더 세지고 점점 '의사가 pick해서 누나가 된 주제에 날 등쳐먹고 있다'는 자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의 근성이 남아서 결정적인 순간엔 항상 내 말에 따르곤 했다. 하지만 그마저 약빨이 떨어져서 요즘엔 자본의 힘을 이용한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동생은 알바생인지라 빈부격차가 꽤 있다. 게다가 나는 산업혁명 시절 노동자처럼 회사에 감금돼 있다 밤에야 풀려나서 돈 쓸 시간이 없는데 동생은 데이트니 뭐니 쓸 데가 많아 항상 돈이 궁하다. 그래서 나한테 아쉬운 소리 해가며 삼만 원씩 오만 원씩 빌려가곤 한다.
'돈을 좀 꿔달라' '돈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돈을 부른다. 그게 이자다.' '오누이끼리 팍팍하다' '그럼 내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이자를 대신하자. 살갑고 좋지 않냐'는 식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동생은 내 일련의 수발을 들다 들다 지치면 그냥 자신을 생활보조인으로 고용해달라는 눈물의 호소를 하기도 한다.
나는 이처럼 동생을 손아귀에서 놓아주지 않으려는 어떤 집요함으로 스물다섯 해를 살았다. 요즘은 동생이 방귀를 많이 뀌는 것에 대해 우리 집도 탄소배출권 제도를 도입해 돈 낸 만큼 방귀를 뀌게 하면 어떨까 구상하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내 동생은 꿇릴 것이 없을 때도 본능적으로 내 눈치를 본다. 마치 유리컵 안에 갇혀 있던 벼룩이 유리컵이 없어지고 나서도 그 이상 뛰지 못하는 것 처럼.
"아 하늘에서 남자친구가 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면 죽지 아마.."
"..."
"...?"
"...니가 죽겠다고?"
"...... 미안..."
이처럼 나는 어느 모로 보나 갑질 할 기질을 타고 났는데 어쩌다 대행사에 와서 을질을 하고 있는지 늘 속상하고 그렇다. 오늘도 나의 유일한 을이 역 앞에서 날 기다린다. 장성한 시중으로 잘 커준 동생을 보니 너무나 대견스럽다. 기쁨의 눈물 한 방울이 흐르지만 얼른 훔쳐내고 동생을 향해 밝게 웃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