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4월 16일 월요일 | 날씨: 춘곤증 두 번 왔다간 졸도각
오랜만에 대학 동기를 만났다. 얘도 학교 다닐 때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했어서 자연스럽게 대행사 얘기를 했다.
"내가 인턴할 때 진짜 대행사는 안 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옆자리 대리 때문이었다. 대리가 고객사랑 전화를 하는데 되에게 상냥하게, 어릴 때 목숨 둬 번 정도 구해준 사람처럼 깍듯하게 대하더란다. 그러다 전화를 끊으면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동시에
"이런 개ㅇㅣㅣㅣㅇㅐ섀끼가!"
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내 친구가 평소에 욕도 안 하고 참 다정한 앤데 그 얘기를 하면서 개새끼를 너무 찰지게 개이ㅣㅣㅣㅣ애썌애끼가 라고 해서 그것도 두 번이나 해서 좀 인상적이었다.
"대행사에 그런 사람들밖에 없을까봐 진짜 가기 싫더라. 난 그래서 친한 친구들이 대행사 간다 하면 쌍수 들고 말렸어"
내가 대행사에 들어갔다고 했을 때 그녀가 크게 축하해줬던 기억이 나며 우리의 우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회사 사람들은 그 정도는 아니...'하다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몇 가지 기억들이 떠올랐다.
내 앞 자리엔 사원 김나래가 앉는다. 김나래는 나보다 6개월 먼저 입사했다. 같은 사원인데 뭘 해도 나보다 6개월어치 이상 잘해서 항상 나를 원통하게 한다. 내가 문법상 옳지 않지만 상황상 써야 하는 극존칭을 찾느라 어미마다 어물거리는 것과 달리 말도 잘 하고 또박또박 발음도 좋다.
김나래가 맡은 고객사는 M브랜드다. M브랜드는 우리 회사 고객사 중에서도 거의 메이웨더 급 양아치여서 김나래는 항상 몇 대 처맞은 얼굴을 하고 다닌다.
그날은 유난히 M브랜드 담당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또 M브랜드가 깐족깐족 쨉을 날리면서 담당자들 약을 살살 올리는구나 싶었다. 근데 쨉 정도가 아니었나보다. 카운터 펀치로 김나래의 이성을 넉다운 시킨 게 분명했다. 메일을 읽던 김나래가 소근소근한 목소리로
"하..이씨발존나빡치게하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정확히 저렇게 말했다. 김나래의 발음이 또박또박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귀에 때려박는 사운드에 다들 감히 김나래를 쳐다도 보지 못했다. 김나래는 3초 정도 있다가
"아 소리 내서 말했네"
라는 여주인공 같은 혼잣말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사실상 고객사와 가장 많이 접촉하는 대리급은 인성이 투게더 아이스크림처럼 야금야금 파먹혀서 이제 밑천도 별로 없다.
우리 팀 대리님도 브랜드H와 하루에 몇 통씩 전화하고 메일 보내고 전화하고 한창 썸 타는 사이처럼 그런다. 브랜드H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연인 같아서 대리님은 전화를 할 때면 일방적 연애에 신물이 난 표정을 짓곤 한다.
우리 대리님은 빡치기 전에 하는 특유의 행동 양식이 있다. 처음엔 통화하는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진다. 아마 나나 팀장님을 의식해서 그런 것 같다. 맘에 없는 사죄의 말을 수화기에 ASMR처럼 속삭인다. 종종 고객사가 너무 감미롭진 않을까 궁금하다. 좀 더 화가 나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옆에서 듣고 있으면 복식호흡 하는 것 같다. 화도 내고 건강도 해지는 일석이조 비법.
"스흐ㅡㅡㅡ읍ㅂ 네에... 하아ㅏ... 그게에.... 저희가 후우... 해야 하는.... 거죠..?"
안경을 벗고 얼굴을 쓸어 내리면 거의 한계라고 보면 된다.
얼마 전에도 대리님이 작은 목소리로 쉬익거리다 안경을 벗고 마른 세수를 하며 차근차근 빡쳐 갔다. 난 충직한 부사수로서 통화 끝나자마자 같이 욕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대리님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던지더니 물론 아이폰은 충격에 약하니까 살짝 던지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책상을 노려봤다. 내가
"어머 걔네가 또 진상부ㄹ..."
까지 말하는데 갑자기 대리님이 자기 뺨을 쨕!쨕! 때리는 거였다.
오우.... 대리님아... 지금 생각해도 정말 찰진 쨕!쨕!이었다. 나는 "진상부ㄹ 커헉.." 하며 말을 삼켰다. 회사 사람들 전부 다 드디어 사단이 나는구나 싶어서는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고 쳐다봤다. 대리님은 말이 없었다. 그의 볼만이 아까의 일이 실재했음을 증명하듯 제철 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대리님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2018 올해의 안절부절을 뽑는다면 바로 그 날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대리님한테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보는 용자가 없다. 그저 '고객사가 나빴네...' 같은 피상적인 감상을 나눌 뿐이었다.
이렇게 대행사에 다니다간 불 위에 오른 바베큐처럼 인성이 바싹바싹 구워지고 살점이 두둑두둑 뜯겨져서 마침내 앙상해 질 거야... 라는 생각을 하다 마침 내 앞에 김나래, 내 옆에 대리님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어떤 불길함이 봄바람처럼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