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의 기자님

by 빵떡씨

날짜: 2018년 5월 12일 토요일 | 날씨: 비 들어와서 운동화 워터파크 하태하태

홍보대행사에 오면 보도자료라는 걸 쓴다. 보도자료가 뭐냐면 기업에 대한 기사를 써서 기자들한테 뿌리고 이것좀 매체에 실어주십사 하는 거다. 왜 기사를 기자가 안 쓰고 우리가 대신 써주냐. 기자들은 보통 'D브랜드, 사랑의 연탄 나눔으로 도움의 손길 전해' 같은 기사보다 'D브랜드, 사랑의 연탄 나눔에 숨겨진 비리 의혹'이라든지 'D브랜드, 사랑의 연탄 나눔에 오너의 숨겨둔 애인 등장...이래서 '사랑'의 연탄 나눔?' 같은 기사를 쓰고 싶어 한다. 좋은 얘기는 곧 죽어도 안 쓰려고 하니 우리가 직접 써바치는 수밖에.

하지만 이렇게 밥을 퍼서 씹어서 목구멍에까지 쑤셔 넣어줘봤자 기자들은 안 읽는다. 이런 보도자료를 하루에 몇십 개 씩 받으니까. 그래서 기자들한테 일일이 우리가 이런 보도자료를 보냈으니 읽어주세요 제발요 하는 전화를 돌린다. 이걸 'rsvp(=Réponse s'il vous plaît-프랑스어: 회신 바랍니다)'라고 하는데 이 단어를 쓰고 있자면 별다줄(=별걸 다 줄이네)을 쓸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rsvp는 주로 막내가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한다. 나는 보도자료는 아직 못 쓴다. 한 번 대리님이 공연 티켓 오픈 보도자료를 나한테 쓰게 했는데 제목을 '[티켓 오픈 소식] 00공연 볼 사람~? 하아~잇! ... 00공연, 사랑이도 좋아해' 따위로 썼다가 하아~잇!킥을 맞을 뻔했다. 일 하기 싫으면 이렇게 븅신 같이 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아무튼 며칠 전에도 전화를 돌렸다. 대행사에선 이럴 때 쓰려고 기자들 전화번호를 죄다 엑셀 파일에 모아 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매체부터 그 양이 실로 방대하다. 이 많은 기자들을 먹여 살리려면 이 좆만한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있어야 하나 싶어 잠시 아득해졌다. 스크롤을 내리다 내리다 검지가 아파 혼자말로 "AI로 바둑 두지 말고 이런 거나 하지" 하니 대리님이 "니가 AI보다 싸게 먹힌다" 하셔서 아주 씨발 친절하고 고마웠다.

기자들도 어떤 부서냐에 따라 전화 받는 성향이 다르다. 경제부나 정치부 기자들은 죄 비트코인 얘기 아니면 핵 쏘는 얘기만 해서 그런지 좀 신경질적이다. "기자님 안녀ㅇ..."까지만 듣고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럼 난 "기자님 안녀ㅇㅓㅇ...안녕~안녕~~"하며 홀로 흥겨운 작별 인사를 한다.

끊진 않더라도 받기 싫은 티를 내는 기자님들도 많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네"
"D브랜드 홍보 담당하고 있는 빵떡입니다"
"네네"
"아 저희가 이번에"
"네"
"기부 사업을"
"네"
"하게 돼서요"
"네네"
"..;; 아 그래서"
"네"
"보도자료를"
"네네"
"오전에"
"네"
"보냈.."
"네네"
"그거 한 번"
"네네네 보겠습니다"
빠르게 비트를 쪼개는 프로듀서처럼 어절마다 네네 거리니 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전화를 끝내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휩싸이는 것이다.

문화부 기자들은 그래도 상냥한 편이다. 이번에 전화한 기자님들도 문화부여서 약간 푸근한 마음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D브랜드 홍보 담당하는 빵떡입니다~"
"아유 네에~"
"M매거진 편집장님 맞으시죠?"
"으응? 아닌데요오~
"어... 아니세요?... 아.. 정말요...?"
"으응~ 나 편집장 아닌데요오~?"
"어..어.... 그.. 저희 리스트에 착오가 있었나보네요"
"으응 그런가 보네요~ 이제 어쩔 거에요~? 편집장 아닌데 어쩔 거야아~?"
"어... 그.. 그럼 혹시 누구..세요..?"
"응? 앜핰학ㅋㅋ 누군지도 모르고 전화했어요오~?"
"어... 어.... 그.. M매거진에서 일하고 계신 건... 맞..맞으세요..?"
"글쎄에~ 맞으실까요~? 맞춰봐아~요오~ㅎㅎ"

전화를 주로 말단 사원이 한다는 걸 알고 놀리는 거다. 일하기 개같고 무료했는데 마침 새파랗게 어린 대행사 직원이 걸려든 것. 삶에 유희가 없다없다 rsvp를 재미 삼는 기자라니. 전화를 끊고나서 감정적으로 좀 혼란스러워졌다. 오랜만에 귀여움을 받은 것 같아 살짝 수줍다가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으며 갑자기 분해졌다.
'다들 막내였던 시절이 있으면서 초심을 잃고 날 못살게 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다시 막내가 될 것도 아닌데 초심 같은 건 전 학년 교과서처럼 불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 끄덕끄덕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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