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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4=

by 빵떡씨

날짜: 2018년 6월 6일 수요일 | 날씨: 1층 뱃살과 2층 뱃살 사이에 땀 영롱하게 차는 날씨

고백하건데 일기를 써오면서 약간의 과장과 거짓을 더한 적이 있다. 있는 그대로 쓰자니 이건 너무 노잼이었다. 이걸 읽느니 통조림 성분분석표를 읽겠다는 마음. '인생이 시발 이렇게까지 지루하구나'하는 괴로움과 그래도 어떻게든 존나 웃기게 쓰고 싶다는 욕망에 글에 야아악간의 조미료를 더했었다. 근데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현실이 워낙 시트콤 같아서. 우리 팀에 팀장이 하나, 대리가 둘, 사원이 둘이었는데 대리 둘과 사원 하나가 퇴사를 했다. 5-3=나랑 팀장님.

김나래 사원-전소진 대리-남석훈 대리가 차례대로 퇴사 통보를 했다. 한동안 팀장님 방 앞은 앞다퉈 퇴사하려는 사람들로 바겐세일하는 아울렛처럼 인산인해였다. 은행 창구처럼 번호표라도 발급해 줘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팀장님과 나는 팀원들의 퇴사 통보를 받을 때마다 차례차례 창백해졌다. 퇴사자 셋이 돌아가면서 때린 데 또 때리는 팀워크가 NBA 랩터스 농구단 뺨쳤다. 일할 때 이랬으면 환상의 팀이었을 텐데. 팀장님은 팀원들이 '할 말 있어요'라는 말만 하면 마시던 담배 연기를 쿠훌럭 쿨럭 토해내는 지경이 됐다.

나는 전소진 대리가 나간다고 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의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고요한 심정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는 긍정적 마인드! 마음에 평정이 찾아오며 이제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을 것 같다고 거들먹 거렸는데 남석훈 대리의 퇴사 소식을 듣고 존나 화들짝 놀랐다. 인생이란 이런 걸까. 생에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발짝 더 나빠지는.

남석훈 대리는 내 사수였다. 새해 소원으로 '쥐좆만한 월급이 어서 모여 대표를 청부살인하게 해주세요'라고 두 손 꼭 모아 비는 사람이었다. 안 되면 직접 목을 따고 퇴사하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던 터라 이번에도 장난인 줄 알았다.
"빵떡, 나 이번 달 말에 퇴사하려고..."
"아 대표님 목은 따셨어요? :)"
"아니..."
"그럼 못 나가시네요 ㅎㅎ"
"응 근데... 퇴사 하려고..."
"...?"
"진짜로..."
"..."
어느 날 아침 출근이 너무 하기 싫더란다. 씨발씨발하고 있는데 심장이 막 쪼이는 느낌이 들다가 토를 했다고. 맨날 일 하기 싫어서 토 나온다더니. 뱉은 말은 반드시 실천하고 마는 남아일언중천금의 대리님이었다.

같이 똥무더기를 치우다가 안 되겠다며 떠나버리는 그들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 고생 많았지... 저들 대신 내가 이 똥을 도맡아 치우리라'는 경건한 마음이었다가 '저 씹새들이 지들만 살겠다고' 하는 분한 마음이었다가 오락가락 했다. 내 분열적 태도에도 퇴사자들은 하루하루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밥도 잘 먹고 잘 웃고 잘 떠들고. 그 동안 회사가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김나래는 5월 중순에 나갔고 두 대리님은 5월 말에 퇴사했다. 처음 김나래가 퇴사할 때 꽃다발에 선물에 포토북에 서울 올라가는 자식새끼 챙기듯 바리바리 싸줬다. 덕분에 대리님들이 퇴사할 때도 같은 급으로 해 바치느라 등골이 휘는 줄 알았다. 퇴사자가 아니라 거의 삥뜯자였다. 돈 십만원이 한꺼번에 비면 애틋한 마음은 사라지고 어디 나를 털어먹고 잘 사나 보자는 앙심을 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애초에 선물을 주는 의미가 퇴색되니 다음부턴 안 챙겨야겠다.

두 대리가 나가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그러니까 4인의 몫을 혼자 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그러니까 죽어가기 시작한지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건드리면 물어 뜯을 것 같은 좆 같은 표정으로 일을 하는데 팀장님이 날 불렀다. 팀장님은 굳이 담배 안 피는 사람을 끌고 내려가서 지 앞에 세워 놓고 담배를 뻑뻑 핀다. 너무 가족 같은 회사라 폐암도 유전시켜 주려는 갸륵한 맘씨인 것 같다.
"빵떡아"
"네?"
"힘들지?"
"좀 그렇네요..ㅎ"
"빵떡"
"네?"
"나도 6월까지만 다닐 것 같아"
"?"
"퇴사해 나"
"..?"
"미안하다"
"..."

담배연기가 뭉개뭉개 눈 앞을 가렸다. 이후에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팀장님의 퇴사는 똥을 같이 치우던 사람이 아니라 똥을 싼 놈이 튀는 거였다. 자기가 싸 놓고 너무 더럽다며 떠나는 꼴. 나는 똥밭에서 생각했다. 역시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가장 좆 같은 순간 한 발짝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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