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6월 24일 일요일 | 날씨: 린넨 옷 700만 원어치 시급
얼마 전 일기에 우리 팀이 공중분해 된 내용을 썼었다. 6월 말까지 다닌다던 팀장님은 워낙에 시대를 앞서가는 분이셔서 6월 둘째 주가 끝나기도 전에 회사를 튀어 나갔다. 떠나는 뒤통수에 대고 소박하게 침 정도 뱉었다.
상황이 이런지라 요즘 회사에선 감히 나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 굶주린 산짐승 보듯 동정하면서도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그럴수록 나는 연민과 그에 수반되는 선의를 기대하며 더 많이 불쌍한 척을 한다. 특히 일을 못 했을 때 '내가 이 옘병을 했지만 불쌍하니 봐줘라'는 식으로 뭉게고 넘어간다. 이 기세를 몰아 회사 좀 쉽게 다닐 방법은 없을까 하는 기회주의적인 생각에 골몰하는 중이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같이 일한다. 유일하게 5월부터 지금까지 나랑 계속 일하는 사람은 인턴 이찬용 뿐이다. 5월에 들어왔는데, 걔 입장에선 오자 마자 4명이 탈주한 거다. 워낙 똘똘한 친구라 회사 돌아가는 꼬라지 보고 아, 여긴 글렀구나 하는 감을 딱 잡은 것 같다.
이찬용은 사실 내 대학 후배다. 전 팀장님이, 아니 그 아저씨가 어시스턴트, 그러니까 싼 값에 후려칠 수 있는 젊은 인력을 구해오라기에 우리 과에 공지를 올렸었다. 유일하게 이찬용만 지원했는데 설마 선배가 못 해먹을 짓을 시키진 않겠지 라는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 같았다. 요즘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대표가 이찬용을 볼 때마다 기간 연장하자고 꼬시는데 이찬용도 만만치 않은 놈이라 눈에 칼이 들어가고 목에 흙이 들어와도 다음 학기에 복학할 거라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럴 게 아니라 축구 골대 앞에 세워 놔야 할 만큼 막강한 철벽수비를 자랑한다.
나랑 이찬용이랑 둘이 있으면 주로 취업 얘기를 한다. 그 때마다 "일단 대행사는 아닌 거 같아요!"라고 굳이 대행사 다니는 사람 앞에서 씨부리는데 강직한 충신 같고 멋있다. 사실 후배들한테 "대행사 오지마라, 죽을 지도 모른다"고 만날 때마다 말 하는데 그럼 이 선배 되게 위트있다는 식으로 깔깔거린다. 진실을 듣고도 믿지 못 하는 우매한 친구들과 달리 이찬용은 어린 나이에 참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값진 시간이 아닐까.
사실 원래부터 내가 이렇게 이찬용한테 호구 잡힌 건 아니었다. 이찬용이 처음 인턴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나는 능숙한 선배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었다.
"찬용아 이건 우클릭 해서 요 함수 쓰고 쭉 드래그하면 돼"
"안 되는데요?"
"...;;"
"..."
"..그러네..."
"찬용아 여기서 길 건너서 택시 타면 돼"
"지도에 여기서 타라고 나와있는데요?"
"그..럴리가 없는데... 내 말이 맞을 텐데..."
"이거 보세요"
"...(흐릿)...그러네.."
나는 선배 노릇에 번번이 실패했고 이제 이찬용도 스스로를 어시스턴트라기보다 수발 드는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가끔 이찬용이 "여긴 짜치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같은 소릴 하면 너무 정확해서 '이 새낀 뭐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회사에 있는 누구보다 회사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느낌. 제 3자라서 가질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각일까. 가끔 그의 냉철한 눈동자에 날 향한 짠한 눈빛도 얼핏 비치는데 이찬용이 날 더 불쌍히 여겨서 내 부탁도 더 잘 들어주고 더 오래, 더 많이 도와주면 좋겠다. 기회주의자의 바람은 오늘도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