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8월 14일 화요일 | 날씨: 이럴 거면 망고라도 열렸으면
요즘 일기 안 쓰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데(한두 명 정도) 그럼 "아 정말.. 정말로 바빠서 말이지..."하며 현대 여성의 고뇌를 슬쩍 내비치곤 한다. 하지만 정말로는 너무 더워서, 손가락 까딱 하기 싫을 만큼 죽도록 더워서 말 그대로 손가락을 까딱 거리길 포기한 것이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반대쪽으로 돌아간 선풍기 대가리가 다시 내 쪽으로 회전해 오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연은 실로 신비해서 입추가 지나니 한 밤 중과 새벽엔 숨 쉴 정도의 온도는 돼 다시 일기를 쓴다. 일기를 안 쓴 동안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점심시간마다 고양이 밥을 주는 일이다. 사실 부족한 점심 시간을 쪼개 고양이를 보살핀 것은 아니고, 점심 시간은 시간 대로 쓰고 1시 10분 쯤에 고양이 밥을 주러 나갔다. 새로 터득한 박애적으로 업무시간을 삥땅치는 방법이다.
내가 고양이 밥을 주는 건 전수정 대리님이 퇴사하실 때 유언처럼 내게 그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대리님은 우리 회사 고양이 소모임인 '1일1냥' 장이셨다. 내가 갓 입사했을 때 '회사에서 회원 당 3만 원씩 활동비를 지원해 준다.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 불쌍한 고양이 사료 값 충당을 위해 가입만 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한테 '아뇨 전 고양이 별로...'라고 할 만큼 소시오패스는 아니어서 가입해줬다. 그랬던 게 대리님이 퇴사하면서 나한테 일을 떠넘겨버렸다.
"빵떡이가 밥을 안 주면 고양이들이 굶을텐데 어쩐다... 불쌍하고 비루먹은 고양이들... 며칠을 못 가 죽을 텐데 어쩐다... 빵떡이가 고양이들을 죽이는 꼴이네 어쩐다..."
전수정 대리님은 사람 하나를 동물학대범으로 만들고 유유히 떠났다. 결국 천생 거절할 줄 모르고 착해빠진 내가 장이 되었다는 그런 스토리다.
우리가 고양이 밥을 주러 가는 곳은 회사 뒤편 돌담이다. 그 돌담을 넘어가면 종묘다. 종묘 하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전에 종묘 관리인이 환경미화를 한다고 고양이 집이랑 밥그릇이랑 다 부숴서 쓰레기 차에 실어 간 적이 있다. 그건 정말 잘못된 행동인데, 고양이 집을 부숴서가 아니라 전 대리님의 구역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전 대리님은 그 지경을 보고 운동도 할 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며 범인을 잡겠다고 아주 악에 받쳤다. 대리님은 돌담 주변 CCTV와 목격자 증언을 싹 다 모았고 결국 종묘 관리인이 한 일이라는 걸 알아냈다. 고소를 하겠느니 어쩌니 하는 대리님한테 찬 물도 맥이고 어르고 달래서 종묘 쪽에 사과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 일로 나는 세상엔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과 건드리면 좆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배웠다.
종묘 관리인 사건 때 우릴 많이 도와준 사람이 있는데, 돌담 맞은편에 사는 참새 아저씨다. 참새 아저씨는 대문 앞에 항상 참새 모이를 줘서 참새 아저씨다. 세상엔 귀여운 동물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더 귀여운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참새 아저씨는 종묘 관리인의 환경미화 현장의 목격자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참새 아저씨는 이미 종묘 관리인을 알고 있었다. 봄에 돌담을 따라 개나리가 폈었는데 종묘쪽에서 싹 다 잘라 버렸었다. 종묘 관리인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게 분명하다. 참새 아저씨는 개나리가 죽오보린 것이 매우 속상해서 종묘 관리인에게 따졌다. 결국 종묘 관리인에게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리님은 참새 아저씨의 환경보호 정신에 크게 감명 받았고 둘이 세계동물보건기구와 그린피스 대표 뺨 올려치는 대화를 나눴다. 이기적인 일개 인간인 나는 그 사이에서 종묘 관리인의 고단스러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대리님이 나가고 한 달 정도는 고양이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 봤는데, 고양이가 더워서 밤에 먹고 가는 거다, 아니다 전 대리님을 따라 간 거다, 아니다 돌담에 사는 너구리가 고양이도 잡아 먹고 고양이 밥도 먹는 거다 같은 신빙성 있는 추론이었다. 혹시 진짜 너구리가 밥을 먹는 거라면 우린 모임을 없애야 할까 아님 너구리 소모임으로 개명을 해야 할까 하는 꽤 진지한 고민도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냈다. '동물농장에 제보하자', '아이폰 타임랩스로 밤새 무슨 일이 있는지 찍자', '이럴 게 아니라 니 아이폰 좀 일단 저기 둬보자'
싸울 것 같아서 참새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참새 아저씨 안녕하세요, 혹시 최근에 고양이를 보신 적이 있나요? 밥은 없어지는데 고양이들은 볼 수가 없네요. 혹시 너구리가 밥을 먹는 건 아닌지 추측도 해봅니다. 아시는 바가 있으면 아래 번호로 전화 주세요.'
그날 저녁에 참새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다. 참새 아저씨피셜에 따르면, '고양이들은 아직 많으며, 밤에 엄청나게 애옹거리면서 싸운다. 발정이 난 것 같다. 최근에 너구리 사체를 발견해서 구청에 신고했다. 하지만 이 근방에 너구리는 더 많으며, 고양이와 너구리가 싸우는 것도 같다' 나는 참새 아저씨 얘기를 들으며 고양이 밥을 다 먹어 너무 퉁퉁해져서 호다닥 뛰지도 못하고 후우우다-다악 뛰어가는 너구리의 모습을 상상했다.
얼마 후에 고양이들은 다시 나타났고 고양이 밥 주는 짓을 자연스럽게 때려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사라졌다.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