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9월 22일 | 날씨: 연휴보다 더 좋은 날씨는 없습니다
열심히 일 하고 싶지 않은 직장인은 없다. 언제나 집중하고 싶고 신속 정확하고 싶다. 그 옛날 짜장면 배달통에 쓰여 있었을 법한 슬로건을 늘 마음에 품고 살지만 실상은 자꾸 실수하고 욕 먹고 출근 길에 퇴근 하고 싶어질 뿐이다. 더딘 손으로 흐린 눈을 비벼봐도 졸음은 가시지 않고 하마터면 이마로 자판을 칠 뻔한다. 우리를 이렇게 일못으로 만드는 건 우리의 무능력이 아니다. 바로 사무실의 망령 때문이다.
1. 위장 망령
직장인이 되기 전에 내가 생각한 직장인의 머리 속은 대략 이렇다.
회사에 온다 - 일 한다 - 일 - 일 - 일 - 일 - ... - 점심 먹는다 - 다시 일 한다 - 일 - 일 - 일 - 일 - ... - 아 쉬마려 - 화장실 간다 - 일어난 김에 물도 마신다 - 다시 일 - 일 - 일 - 일 - 퇴근
업무 시간의 80%는 일을 하고 20%는 그 외의 잡다한 것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직장인의 뇌는 전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회사에 온다 - 잠든 뇌를 깨워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 카페에 간다 - 라떼..는 좀 헤비하고 아이스티...는 너무 달고.. 스무디... 살 찌고.. 오늘도 아메리카노 - 일을 시작해볼까... 하는데 커피 때문에 입이 좀 찝찌름하다 - 물을 마시고 싶다 - 텀블러를 씻어온다 - 물을 마신다 - 쉬가 마렵다 - 화장실에 간다 - 이제 일...을 하려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 담백하면서도 포만감 있는 무언가를 먹고 싶다 - 다이제.. 아니야.. 에너지 바도 좋고... 곤약젤리.. 아 스콘 - 곧 점심 시간인데 먹지 말고 참을까 - 먹을까 - 참을까 - 먹을까 - 먹는다 - 점심 뭐 먹지 - 국밥.. 칼국수... 돈까스.. 떡볶이... 어 좋다 떡볶이 - 점심 시간이다 - 점심 먹는다 - 배부르다 - 아메리카노로 음식물을 눌러준다 - 그래도 배가 부르다 - 위장에서 떡이 부는 게 분명하다 - 아메리카노가 목구멍에서 찰랑거린다 - 너무 많이 먹었어 - 난 항상 이런 식이야 - 병신 새끼 - 이러니까 살찌지 - 저녁은 진짜 굶는다 - 이제 일을 해보자 일을 ㅎㅐㅂ... ㅎ...ㅂ.. - 어 졸았다 - 잠을 깨야.. ㄲㅐㅇ.... - ... - 어이쒸 - 젤리를 먹자 - 편의점 갈까 - 눈치 보이네 - 갈까 - 말까 - 갈까 - 말까 - 간다 - 으음 맛있네(쫄깃) 이제 일을(쪼올깃) 해볼ㄲ(쪼-올깃)(쫄깃)(쫄깃)(쫄깃쫄)(깃쫄깃쫄) - 입이 달다 - 탄산수 없나 - 탕비실에 간다 - 탄산수 마신다 - 똥이 마렵다 - 싼다 - 개☆운 - 다섯 시다 - 다섯 시 반이다 - 다섯 시 사십육 분이다 - 다섯 시 오십 분이다 - 다섯 시 오십오 분이다 - 여섯 시다 - 야근
이것이 바로 사악한 위장 망령의 소행이다. 고픔과 부름의 굴레를 끝없이 반복한다. 배고플 때, 존나 배고플 때, 배가 고픈 듯 안 고플 때, 배가 고프진 않지만 단 게 땡길 때, 단 걸 먹어서 입이 개운치 않을 때, 배 불러서 토할 것 같을 때 등등 다양하게 일 하기 나쁜 상태만 존재한다. 몸의 이런 저런 요구를 들어주며 일 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를 찾느라 정작 일은 못한다.
2. 우주 망령
우주 망령은 클라쓰가 다르다. 아주 철학적인 녀석이다. 주로 새벽 야근이나 고된 노동, 인격 모독 등 하드 코어한 상황에서 찾아온다. 혹은 아예 반대로 몹시 지난하고 권태로운 때에 나타나기도 한다. 우주 망령에 사로잡힌 직장인의 의식은 대략 이렇게 흐른다.
좆 같다 - 왜 이렇게 좆 같을까 - 이렇게 큰 우주에 - 난 우주의 먼지 - 은하계의 좆밥 - 이 좆밥 같은 삶도 겨우 100년 남짓 - 그 중에서 족히 60년은 더 일해야 한다 - 늙고 일 할 날만 남은 우주 좆밥 - 나는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나 - 그렇지 않다 - 이건 인생이 아냐 - 자아를 실현해야 한다 - 근데 어차피 좆밥인 자아를 실현해 봤자 좆밥일 텐데 뭐하러 - 인간이란 대체 뭘까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 - 신이 싼 똥에 우연히 생긴 효모 - 신은 있을까 -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은 우연의 결과일까 - 아무 의미 없이 - 모두 왜 사는 걸까
직장인은 꼬리를 무는 물음들과 언뜻 답처럼 보이는 생각들 사이로 꼬륵꼬륵 가라앉는다. 주변과 단절되어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 같은 것들을 고뇌하다 보면 업무시간이 순삭돼 약간 개이득이기도 하다. 이 망령은 흔히 현타라고도 부른다.
3. 해야 하는데 망령
네이버 메인에서 스크롤을 드륵 내린다. 블핑이들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살 빼야 하는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빼야 한 살이라도 더 예쁘게 살지... 아 살을 빼도 예뻐지진 않는구나.... 네이버 검색창에 '다이어트 도시락'이라고 쳐본다. 아 기타도 배우고 싶은데 기타.. '종로 기타학원' 검색... 취미생활은 정말 중요해... 삶을 풍요롭게 하지.... 맞다 집 가면 빨래 돌려야지.. 어떻게 옷에서 그런 냄새가 날까... 옷장이 토를 했나... 카톡 내게 쓰기로 투 두 리스트를 보내 놓자.. 내 삶과 행복을 위해 정말 중요한 일들이야... 퇴근 하면 꼭 해야지.... 해야 하는데 망령은 업무 시간 내내 직장인을 따라다니다가 퇴근 하고 SNS를 처 들여다 보기 시작하면 바로 사라진다.
겉으론 평온하게 타자나 탈칵탈칵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장인의 뇌는 매일이 이토록 전쟁이고 정글이고 재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