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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셰어하우스 괴담

살아 있는 변기와의 조우

by 빵떡씨

날짜: 2018년 9월 29일 토요일 | 날씨: 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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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3개월 차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니 하루 통근 시간이 240분에서 40분으로 줄었다. 새로 생긴 200분 동안 무얼 해야 할지 몰라 길가에 서서 손바닥을 내려다 보거나 감격에 겨워 하늘로 팔을 뻗고 겅중겅중 뜀박질을 하는 요즘이다. 셰어하우스는 회사에서 직원들이 사용하도록 제공해 준 거다. 다섯 명이서 한 집에 보증금 없이 월 30에 살 수 있다. 이게 비교적 싸긴 싼데 거저라고 할 만큼 싼 건 아니어서 선심은 배풀고 싶은데 배포가 작은 사람의 호의를 받는 기분이다. 나도 딱 그정도만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내가 처음 셰어하우스에 온 날, 거실에 들어섰는데 입주자 셋이서 마일리사일러스 영상을 보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주황 바지에 초록 반팔을 입고 스쿼트를 하는 정유미를 보면서 뭔가 뿌리채 뽑히고 있는 당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혼란한 와중에 김준서가 날 발견하고 플랭크 자세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난 그에 대한 화답으로 모나리자 같은 미소를 신비롭게 지어주었다. 내 신비로운 셰어하우스 생활은 <대학내일> 20's Voice에서 읽어볼 수 있다.


(↓↓ 커피와 아무 상관 없는 기고 글 ↓↓)https://univ20.com/91062


잠시 기고글을 쓸 때 고충을 털어 놓자면 왠지 이러저러한 깨달음을 얻었다~ 로 끝내야만 할 것 같다. 초장에 흥미로운 썰을 풀다가 끝엔 교훈으로 마무리. 저 글도 원래는 <사회생활 조빱이 셰어하우스에 가면 안 되는 이유> 같은 제목으로 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저런 온건한 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셰어하우스는 그렇게 온건한 곳이 아니다. 괴담이 무성하고.. 월세 밀린 지박령들의 혼이 떠도는 곳... 특히 밤이 되면 어떤 음산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지금부터 내가 셰어하우스에서 겪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새벽 두 시의 침입자>
쿵 쿵 쿵 쿵
쿵쿵 쿵 쿵쿵 쿵쿵
쿵 쿵 쿵 쿵 쿵쿵쿵쿵쿵쿵
꿈에 래퍼가 나왔는데 이상하게 랩은 안 하고 계속 비트만 찍더랬다. 비트의 bpm과 땜삥이 점점 강력해지는 그 순간... '이건 꿈이고 이 쿵쿵거리는 비트는 현실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이라는 자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잠결에 핸드폰을 켜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왜이렇게 시끄러워.. 아무리 전통을 사랑해도 새벽 두 시에 집에서 북청 사자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윗층의 교양 없음에 비몽사몽 분개 하고 있는데 번뜩 어떤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여긴 윗층이 없는데'

팔에 소오오름이 돋으면서 잠이 확 깼다. 나는 2층 침대 아래로 두 바퀴 돌아 점프한 후 거실로 나갔다. 소싯적 스파이 하던 실력을 살려 민첩하게 현관으로 이동했다. 귀를 기울이는데 이 소리는.. 이 소리는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유리문이었다. 홱 돌아 베란다를 보니 검은 실루엣이 베란다 창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쾅!쾅!쾅!쾅!쾅!쾅!

우리 셰어하우스는 입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닫히면 저절로 잠기는 케이씨씨 창호를 사용하고 있다(PPL 느낌). 그걸 깜빡하고 세탁기를 돌리러 나간 홍수아가 안전하게 베란다에 갇힌 것. 나중에 홍수아에게 들은 바로는 처음엔 "준서야~ 유미야~ 문 좀 열어줘~"하고 소곤소곤 부르다가 점점 좆 된 느낌이 물씬 들기에 주먹으로 내리 치며 살려달라고 외쳤다고 한다. 또 홍수아 말로는 내가 "아이구 가요오~~ 가요~가아~"하며 뛰쳐나와 문을 열어줬다는데 절대 그럴리 없고 꾸며낸 말인 것 같다.

<변기가 살아 있다>
나는 정유미랑 같은 방을 쓴다. 그런데도 정유미와 직접 대화 한 적은 별로 없다. 정유미가 깨기 전에 내가 나가고 정유미가 잠든 후에 내가 들어 오기 때문이다. 정유미는 주로 독사과를 먹고 영면에 든 백설공주처럼 21세기의 독 스마트폰을 품에 꼭 안고 잠든다. 나는 누군가의 생가(生家)를 관광하는 마인드로 남겨진 흔적을 통해 정유미와 교감한다. 분리수거 된 컵라면이나 맥주 캔, 바닥에 흩어진 화장품, 요가매트, 책, 버려진 화장솜... 오늘 집에 와서 이러저런 걸 하고 저러이런 걸 먹고 또 SNS를 하다 잠 들었구나.. 정유미 어머니가 이 꼴을 안 보셔서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내가 집에 왔을 때 정유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늦나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2층 침대에서 내려 왔다. 근데 정유미는 보이지 않고 정유미의 옷들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벗어져 있다기보다 누군가 탈출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잠결에도 바지가 거의 새 주인 찾아 갈 기세라고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 뚜껑을 올렸는데...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허준이라도 불러서 맥이라도 짚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봐버린 것이다. 살아 있는 변기를! 변기는 아큐브 오렌지 그레이 색 눈동자로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비몽사몽 간에 저 변기가 정유미를 잡아 먹은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코웃음 칠 수도 있지만 새벽에 눈알이 동동 떠 있는 변기를 조우했다고 생각해 봐라. 우리는 이때껏 변기를 어떻게 대했는가. 우리의 뒷 일을 다 받아 준 변기를 오히려 더럽다고 업신 여기고 <핸드폰 오염도 수치 변기보다 높아, 이대로 괜찮은가> 같은 뉴스 헤드라인으로나 써먹었다. 그런 변기가 이젠 '씨발 어제 싼 똥은 좀 심하잖아'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정유미는 다음 날 정화조가 아니라 거실에서 발견됐다. 술 처먹고 거실에서 잠들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원데이 아큐브 렌즈는 용케 변기에 버리고 잤다고.

<끝>
그래 끝이다. 더 이상 에피소드가 없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삼 세 번에 길들여져서 무조건 세 가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정말 고정관념이다. 내 얘기는 두 개가 전부다. 나는 집도 없어서 천상 남이랑 한 집에 같이 구겨져 사는 직장인이다. 이런 삶에 재미 있는 얘기가 세 가지나 있을리가 없다. 아무도 뭐라고 안 했지만 그냥 혼자 찔려서 쉬익거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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