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8년 11월 22일 목요일 | 날씨: 낙엽이 내 각질처럼 소복이 쌓인 날 (갬성 실패)
우리 팀은 H기업 SNS를 관리한다.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내년엔 네이버 포스트까지 할 예정이다. 이렇게 채널이 많으면 방탕하게 자신의 씨를 뿌린 조선시대 놈팽이처럼 나중엔 무엇이 내 새낀지 알 도리도 없을 것 같다.
자식새끼 같은 채널들 중에서도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는데 바로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골목 시장 같은 느낌이 있다. '대출상담', '장미네 단란주점', '언니 유흥가요' 같은 전단지만 홀홀이 나부끼는 폐허가 된 상점이랄까.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 손님은 없고, 그저 그런 전단지를 뿌리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먼지 바람을 일으키는 삐끼 뿐. 그 와중에 나도 뭐라도 팔아보려고 확성기에 소리소리를 지르지만 '한 단에 오천 원' '빅 세일' '마감 땡처리' '빵빵' 같은 소리에 묻혀 확성기를 들 의지마저 사라지고 만다.
그때 저 먼 곳에 손님처럼 보이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모든 행사와 전단지와 확성기 소리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정작 뭘 사는 것 같진 않다. 그들을 일러 '체리피커(cherry-picker)'라 한다. 영어 뜻 그대로 체리처럼 맛있는 부분만 쏙쏙 골라 먹고 돈은 거의 쓰지 않는 사람들을 뜻한다. 페이스북에 스타벅스 기프티콘, 씨지브이 영화 티켓 같은 걸 주는 이벤트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벤트만 전문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온건한 프로필 사진과 무해한 이름-젊은 여자 사진과 '김민지' 같은 이름-을 달고 '#엔젤리너스 #20주년 넘넘 추카해여 (폭죽)(폭죽)(웃음)(웃음) 커피라면 죽고 못 사는 내 친구 @이지은 소환 >_<' 같은 댓글을 브랜드 이름만 바꿔 여기저기에 달고 다닌다.
체리피커인지 아닌지는 페이지에 들어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들의 페이지는 이벤트 공유 게시물로 도배된 경우가 많다. 네네치킨 이벤트 아래 코웨이 이벤트 아래 현대자동차 아래 맥도날드 아래 공차 아래 씨유 아래 맥스웰 하우스 아래 던킨도넛 아래 베스킨라빈스... 모든 제품군과 경쟁사가 한 자리에 모여 대통합을 이루는 모습이 보기에 좋더라. 하루에 100개 이상의 게시물을 공유하는 기염을 토해내는 체리피커도 있는데 이 정도면 체리피커를 업으로 삼은게 아닐까 싶다.
체리피커 세계에도 나름 배려와 상도덕이 있다. 일단 좋은 이벤트를 보면 서로서로 태그하고 공유한다. 그래서 이 체리피커가 저 체리피커를 태그하고 저 체리피커가 그 체리피커를 불러오는, 그래서 이벤트 당첨자를 뽑아 놓으면 신기하게도 서로 다 아는 사람인, 벗어날 수 없는 체비우스의 띠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당첨자 발표 게시물에서 체리피커들이 댓글로 서로서로 당첨을 축하해주는 훈훈한 풍경을 보면 누구를 위한 이벤트인지 다시 한번 숙고해보게 된다. 이벤트란 무엇인가.
체리피커라고 다 같은 체리피커는 아니다. 그 중에서도 악질이 있는데 이들은 이름을 계속 바꿔가며 이벤트에 참여한다. 페북지기가 당첨자를 뽑을 때 전 이벤트에 뽑혔던 사람은 거른다는 사실을 아는 배우신 분들이다. 체리피커의 생태계를 뒤흔드는 이 배스 같은 분들은 경품을 닥치는 대로 먹기 때문에 '이벤트 헌터'라고 불린다. 가끔 페메로 체리피커가 이벤트 헌터를 신고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컨데 '지기님 이벤트 헌터 신고합니닷!!! 김수지=김세진=김세현=김세르비아 모두 동일 인물입니다! 공정한 선정 부탁드립니다 ㅠㅠ' 같은 내용이다. 보고 있자면 유치원 아이들이 얘가 잘못해써여 아니에여 쟤가 먼저 그래떠여 하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한 대씩 쥐어박고 싶고 그렇다.
이건 마치 외래종만 득실대는 연못에서 산천어를 낚겠다고 떡밥만 존나게 뿌리는 심정. 착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면 고객사에게 "이건 돈을 버리는 짓입니다!! 차라리 매장에 오는 사람들한테 만 원씩 쥐어 보내요!!!"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럼 당장 직장을 잃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직 페북을 하는 사람이 많고.. 효과적이니...눈 먼 돈을 조금만 더 내어주세요.."하는 말을 경력 짧은 사기꾼처럼 주억거리는 것이다. 앞으로 기업은 대행사를 고를 때 페이스북은 다 망해가니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는 강직한 충신 같은 대행사가 있다면 삼고초려라도 해서 모셔오길 바란다.